사피엔스 필사 58

제4부 과학혁명/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402~412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4부 과학혁명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필사와 단상]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것은 근대 초기의 많은 천문학자가 강한 흥미를 느꼈던 문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 이후에 특히 그랬다. 다수의 천문학자와 수학자가 계산을 시도했지만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서로 크게 다른 결과를 낳았다. 신뢰할 만한 측정방법이 제시된 것은 18세기 중반이었다.

금성은 여러 해에 한 번씩 지구와 태양 사이를 직접 가로지른다(실제로는 1백여 년의 터울을 두고 약 8년 간격으로 두 차례씩이다. 이를 '금성의 태양면 통과'라고 한다 - 옮긴이). 이때 태양의 일부가 금성에 가려지는 '금성의 식蝕' 현상이 생긴다. '식'의 지속 시간은 지구 표면의 어느 지점에서 관측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관측자가 금성을 바라보는 각도에 미세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식'을 각기 다른 대륙에서 관찰하면, 단순한 삼각측량법을 이용해 태양까지의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다음번 금성의 식이 1761년과 1769년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고, 가능한 한 서로 먼 거리에서 식을 관찰하기 위해서 탐험대를 세계의 구석 네 지점으로 파견했다. 1761년 과학자들은 시베리아, 북미, 마다가스카르, 남아프리카에서 식을 관찰했다. 그리고 1769년의 식이 다가오자, 유럽의 과학공동체는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멀리 북구 캐나다와 캘리포니아(당시는 황무지였다)에까지 과학자들을 파견했다.

'자연지식의 개선을 위한 런던 왕립협회'는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정확한 답을 얻으려면 머나먼 남서 태평양까지 천문학자를 한 명 보내는 것이 필수였다. 왕립협회는 저명한 천문학자인 찰스 그린을 타히티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돈도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막대한 비용이 드는 탐사 기회를 단 한 차례의 천문 관측에만 이용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따라서 그린에게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과학자 여덟 명으로 구성된 팀이 동행했으며,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와 대니얼 솔랜더가 팀을 이끌었다. 과학자들이 마주칠 것이 분명한 신천지, 동식물, 사람을 스케치하는 임무를 띤 화가 한 사람도 포함되었다.

뱅크스와 왕립협회는 구입할 수 있는 최신의 과학장비를 갖췄고, 탐험대는 경험 많은 뱃사람인 동시에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민족지誌 학자인 제임스 쿡 선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탐험대는 1768년 영국을 출발해 이듬해 타히티에서 금성의 식을 관측하고 태평양의 여러 섬을 답사한 뒤, 호주와 뉴질랜드에 들렀다 1771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막대한 양의 천문학, 지리학, 기상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 자료를 싣고 귀국했다.

탐험대가 찾아낸 것들은 많은 학문분과에 크게 기여했으며, 남태평양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한 유럽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다음 세대의 박물학자와 천문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쿡의 탐험에 혜택을 받은 분야 중 하나는 의학이었다. 당시 먼 곳의 해안을 향해 돛을 올리는 선박들은 선원의 절반 이상이 항해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신은 분노한 원주민이나 적의 전함이나 향수병이 아니었다. 괴혈병이라 불리는 의문의 질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피로하고, 우울하며, 잇몸을 비롯한 연약 조직에서 피를 흘렸다. 병이 진행되면 치아가 빠지고, 사지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괴혈병으로 사망한 선원은 약 2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으며 어떤 치료법도 소용이 없어, 선원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1747년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영국 의사 제임스 린드가 이 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대조 실험을 시행한 것이다. 그는 이들을 여러 집단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다. 한 집단에는 괴혈병에 흔히 쓰이는 민간요법인 감귤류를 먹으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러자 이 집단에 속한 환자들이 급속히 회복되었다. 린드는 감귤에 선원들의 몸에 부족한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비타민 C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시 배에서 먹던 식품에는 이 영양소가 특히 부족했다.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원들은 비스킷과 말린 쇠고기로 연명했으며 과일이나 채소는 거의 먹지 않았다.

영국 해군은 린드의 실험 결과를 믿지 않았지만, 제임스 쿡은 믿었다. 그는 이 의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 배에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대량으로 실었으며, 탐험대가 육지에 상륙할 때마다 선원들에게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지시했다. 쿡은 괴혈병으로 한 명의 선원도 잃지 않았다. 그다음 몇십 년간 세계의 모든 해군은 쿡의 해양 식단을 따랐으며, 수없이 많은 선원과 승객이 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쿡의 탐사는 그보다 훨씬 덜 바람직한 결과도 낳았다. 쿡은 경험 많은 뱃사람이자 지리학자일 뿐 아니라 해군 장교이기도 했다. 왕립협회가 탐험 비용의 대부분을 댔지만 선박 자체는 영국 해군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해군은 또한 85명의 잘 무장한 선원과 해병대를 파견했으며 배에는 대포, 머스킷 총, 화약을 비롯한 무기가 실려 있었다. 탐사대가 수집한 정보 중 많은 부분 - 특히 천문학, 지리학, 기상학, 인류학 데이터 - 은 정치 군사적 가치가 뚜렷했다. 괴혈병의 효과적인 치료법이 발견된 덕분에 , 영국은 세계의 대양을 지배하고 지구 반대편에 군대를 보내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쿡은 자신이 '발견한' 수많은 섬과 육지에 대해 영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호주였다. 쿡의 탐사대는 영국이 남서태평양을 점령하고, 호주, 태즈메이니아, 뉴질랜드를 정복하고, 수백만 명의 유럽인이 새로운 식민지에 정착하며, 그곳의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대부분을 박멸할 기초를 닦아주었다. 쿡의 탐사 다음 세기에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은 가장 비옥한 땅을 유럽 정착민들에게 빼앗겼다. 원주민의 수는 90퍼센트가량 줄었고 생존자들은 인종차별적인 가혹한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호주 원주민과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 쿡의 탐사는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파국의 시작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거의 몸살 당했다. 유럽 정착인들은 처음에 이들을 섬의 가장 비옥한 영역에서 몰아냈고, 이어 남아 있는 황무지까지 탐낸 나머지 이들을 체계적으로 사냥하고 살해했다. 최후의 생존자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 복음주의교과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선의를 지녔지만 그다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선교사들이 서구 세계의 방식으로 이들을 가르치려 했다. 테즈메이니아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를 배웠으며, 천을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한 '생산적 기술'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습을 거부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우울해했으며, 아기를 갖지 않게 되고 삶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과학과 진보의 현대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아, 과학과 진보는 이들의 사후세계에까지 좇아갔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태즈메이니아인들이 사체를 강탈했다. 그들은 사체를 해부하고, 무게를 재고, 측정하여, 그 분석 결과를 학술지에 실었다.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그로부터 1백 년 전에 사망한 원주민 트루가니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그는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순수 혈통이라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인물이다. 영국 왕립외과대학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표본을 2002년까지 보유했다.

쿡의 배는 군대의 보호를 받은 과학탐사대였을까, 아니면 소수의 과학자가 따라붙는 군사원정대였을까? 이것은 연료통이 반쯤 찼는지 반쯤 비었는지를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둘 다에 해당한다. 과학혁명과 현대 제국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제임스 쿡 선장과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 같은 사람들은 과학과 제국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 불운한 트루가니니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유럽인가

북대서양의 큰 섬에서 온 사람들이 호주 남쪽의 큰 섬을 정복했다는 사실은 역사상 가장 기괴한 사건 중 하나다. 쿡의 탐험이 있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제도와 서유럽 전반은 지중해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일어난 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제국이었던 로마 제국도 대부분의 부를 북아프리카, 발칸, 중동지방에서 얻었다. 로마에게 서유럽은 초라하고 황량한 서부에 지나지 않았고, 광물과 노예를 제외하면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북유럽은 워낙 황량하고 미개해서 심지어 정복할 가치조차 없었다. 유럽이 중요한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온실이 된 것은 15세기말에야 생긴 일이었다. 1500년에서 1750년 사이 서유럽은 세를 얻고 '외부 세계' - 남미와 북미의 두 대륙과 대양을 의미한다 -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심지어 그때도 유럽은 아시아 강대국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유럽이 어찌어찌 미 대륙을 정복하고 바다의 패권을 획득한 것은 주로 아이사의 강대국들이 그런 지역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덕분이었다. 근대 초기는 지중해의 오토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위 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 중국의 명과 청 왕조의 황금시대였다. 이 제국들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인구와 경제가 전대미문으로 성장했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규모를 합친 것만으로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2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유럽은 경제적 난쟁이였다.

세계의 권력 중심이 유럽으로 이동한 것은 17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이르러서다. 이때 유럽인들은 일련의 전쟁에서 아시아 강대국들에게 모욕을 안기고, 그 영토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다. 1900년이 되자 서유럽과 미국을 합친 생산량은 세계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 넘었고, 중국이 차지하는 몫은 5퍼센트로 축소되었다. 유럽의 방패 아래 새로운 세계 질서와 세계 문화가 등장했다. 요즘 사람들은 당사자들이 통상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수준으로 유럽식 복장을 하고, 유럽식 사고방식과 취향을 지니고 있다. 말로는 격렬한 반유럽 정서를 드러낼지도 모르지만,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은 정치, 의학, 전쟁, 경제에 대해 유럽적 시각을 견지하며, 유럽식으로 작곡된 곡에 유럽 언어로 된 가사가 붙은 음악을 듣는다. 오늘날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 머지않아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할지도 모르는 그 나라의 경제도 유럽식 생산 및 금융 모델 위에 건설되었다.

어떻게 유라시아 변방에 있던 이들은 그 오지에서 뛰쳐나와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보통은 그 공의 큰 부분을 유럽 과학자들에게 돌린다. 물론 1850년 이래 유럽의 세계 지배가 군사-산업-과학 복합체와 기술의 묘기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근대 후기의 성공한 제국들은 모두가 기술적 혁신을 이루리라는 희망을 품고 과학연구를 장려했으며, 많은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주인을 위해 무기, 의학, 기술을 개발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아프리카인 적을 맞이한 유럽 군대가 흔히 했던 말은 "뭐가 오든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기관총이 있고 그들에게는 없다"였다. 민간기술의 중요성도 군사기술 못지않았다. 통조림은 병사들을 먹여 살렸고, 철도와 증기선은 군대와 장비를 수송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의약품이 병사와 선원과 기관차 엔지니어들을 치료했다. 병참 부문에서의 이 같은 진보는 유럽인의 아프리카 정복에 기관총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850년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군사-산업-과학 복합체는 아직 유년기였고, 과학혁명의 과실은 여물지 않았으며,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강대국들 사이의 기술 격차는 크지 않았다. 1770년 제임스 쿡은 분명 호주 원주민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을 지녔지만, 그렇기로는 중국인이나 오토만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호주를 탐험하고 식민지로 만든 사람은 제임스 쿡 선장이었을까? 왜 왕롱안 선장이나 후세인 파샤 선장이 아니었을까? 더욱 중요한 문제로, 만일 1770년 유럽인들이 우슬림, 인도인, 중국인보다 기술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다음 세기에 자신들과 나머지 온 세상 사이에 그렇게 큰 격차를 만들 수 있었을까?

어째서 군사-산업-과학 복합체는 인도가 아니라 유럽에서 꽃피었을까? 영국이 약진했을 때 어째서 프랑스, 독일, 미국은 재빨리 따라가고 중국은 뒤처졌을까? 산업화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의 격차가 명백한 정치경제적 요인이 되었을 때, 어째서 러시아, 이탈리아, 호주는 그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고, 페르시아, 이집트 오토만 제국은 실패했을까? 누가 뭐래도 1차 산업혁명기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편이었다. 증기기관과 기관총을 만들고 철로를 놓는 것이 중국인이나 오토만인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세계 최초의 상업용 철로가 개통된 것은 1830년 영국에서였다. 1850년이 되자 서구 국가에는 4만 킬로미터의 철로가 종횡무진 달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라카의 철로는 총연장 4천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1880년 서구에 깔린 철로는 35만 킬로미터가 넘었지만, 나머지 세계의 철로는 35,000킬로미터에 불과했다(이 중 대부분은 영국이 인도에 놓은 것이었다).

중국에 철로가 놓인 것은 1876년에 이르러서였다. 길이 24킬로미터로 유럽인이 건설했는데, 중국 정부는 이듬해 이것을 파괴했다. 1880년 중국 제국에선 단 하나의 철도도 운영되지 않았다. 페르시아에 철도가 처음 놓인 것은 1888년에 들어와서였다. 테헤란과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무슬림 성지를 연결하는 공사였는데, 건설과 운영은 벨기에 회사가 맡았다. 1950년 페르시아에 놓인 철로는 총연장 2,50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국토 면적이 영국의 일곱 배인 나라로선 형편없이 적은 수치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없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이 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의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 경이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경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유럽 제국주의가 21세기 유럽 이후 세상에 남긴 가장 중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다음 장에서 검토한다. 이 장은 유럽 제국주의와 근대 과학 간의 연애담에 바치자.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