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59

제4부 과학혁명/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412~442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4부 과학혁명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필사와 단상]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정복의 사고방식

근대 과학은 유럽 제국 덕분에 번창할 수 있었다. 근대 과학이 고전시대 그리스, 중국, 인도, 이슬람 등의 고대 과학 전통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독특한 성격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초기에 이르러서였다. 이 과정은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나란히 일어났다. 근대 초기 동안 중국인, 인도인, 무슬림, 아메리카 원주민, 폴리네시아인은 계속해서 과학혁명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는 무슬림 경제학자달의 통찰을 배웠고, 아메리카 원주민 의사들이 개척한 치료법은 영국의 의료 문헌에 자리를 잡았으며, 학자들이 폴리네시아인들로부터 얻어낸 정보는 서구 인류학에 혁명을 가져왔다.

하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이런 방대한 과학적 발견을 수집, 분석하고 그를 통해 과학적 학문을 창조한 것은 세계적 유럽 제국을 지배하는 지적 엘리트들이었다. 극동과 이슬람 세계에도 유럽 못지않게 지적이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윈 생물학에 비슷하기라도 한 것조차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과학을 잘하는 독특한 유전자를 지녔다거나 이들이 물리학과 생물학을 영원히 지배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슬람교가 아랍인 독점으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터키인과 페르시아인도 믿게 된 것처럼, 현대 과학은 유럽인의 전문 분야로 시작했지만 오늘날은 다민족의 사업이 되고 있다.

무엇이 현대 과학과 유럽 제국주의 사이의 연대를 구축했을까? 19세기와 20세기에는 기술이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근대 초기에는 기술의 중요성에 한계가 있었다. 핵심요인은 식물을 찾는 식물학자와 식민지를 찾는 해군장교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데 있었다. 과학자와 정복자는 둘 다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들은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들은 둘 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겠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새로운 지식이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기를 둘 다 희망했다.


유럽 제국주의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모든 제국주의 프로젝트들과 완전히 달랐다. 과거의 제국 추구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복은 단지 '그들의' 세계관을 활용하고 퍼뜨리는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아랍인들은 이집트나 스페인 혹은 인도를 정복했지만,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 몽골인, 아즈텍인들이 탐욕스럽게 새 땅을 정복한 것은 권력과 부를 찾아서였지, 새 지식을 찾어서는 아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새 영토뿐 아니라 새 지식을 획득한다는 희망을 안고 먼 곳의 해변을 향해 떠났다. 이런 생각을 한 최초의 탐험가가 제임스 쿡은 아니었다. 15~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항해자들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항해자 엔히크 왕자와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고 그 과정에서 섬과 항구의 지배권을 강탈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자 즉각 스페인 왕의 통치권을 선포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세계 일주 항로를 찾아냈고, 이와 동시에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할 기초를 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의 정복과 영토의 정복은 점점 더 긴밀하게 합쳐졌다. 18~19세기 유럽을 출발해 먼 나라로 향한 주요 군사탐험대는 거의 모두 과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과학지식의 발견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165명의 학자를 데려갔다. 이들은 많은 일을 해냈지만, 무엇보다도 이집트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학문을 구축했고, 종교, 언어, 식물 연구에 중요하게 기여했다.

1831년 대영제국 해군은 측량선 비글호를 보내 남아메리카 해안과 포틀랜드 섬, 갈라파고스 제도의 지도를 작성하게 했다. 해군은 남미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런 지식이 필요했다. 아마추어 과학자였던 선장은 탐험 도중 만나게 될 지형을 연구하기 위해서 탐험대에 지리학자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전문 지리학자 여러 명이 그의 초청을 거부하자, 선장은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22세의 찰스 다윈에게 이 업무를 제안했다. 다윈은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으나, 성경보다는 지리학과 자연과학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 이후는 알다시피 역사가 되었다. 선장이 군사 지도를 그리느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윈은 질증적 자료를 수집하고 통찰력을 형성했으며, 이것이 종국에는 진화론으로 꽃 피웠다.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스 올드린은 달 표면에 착륙했다. 탐험에 앞서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은 몇 개월간 달과 환경이 비슷한 미국 서부 사막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지역은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의 ㅣ고향인데, 우주비행사들과 한 원주민과의 만남을 담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훈련 중이던 우주비행사는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연히 마주쳤다. 남자는 우주비행사들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달을 탐사하기 위해 곧 떠날 원정대의 대원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세요?" 그들은 물었다.

"우리 부족 사람들은 달에 신성한 정령들이 산다고 믿는다오. 그들에게 우리 부족에서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를 당신들이 전해줄 수 있을까 해서."

"그 메시지가 뭔데요?" 우주비행사들이 물었다.

남자는 자기 부족의 언어로 뭐라고 말했고, 우주비행사들에게 그 말을 정확히 외울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게 시켰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주비행사들은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이 말의 뜻은 우리 부족과 달의 정령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이랍니다."

기지로 돌아온 우주비행사들은 그 부족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통역할 사람을 찾아내어, 비밀 메시지를 해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암기한 내용을 되뇌자 통역자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우주비행사들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통역자는 비행사들이 조심스럽게 암기한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마디도 믿지 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욌어요."



비어 있는 지도

'탐험하고 정복한다'는 근대의 사고방식은 세계지도의 발전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이전에도 수많은 문화권에서 세계지도를 그렸다. 단언하건대, 그중 어느 것도 세계 전체를 정말로 알고 그린 것은 없었다. 아프로아시아에서 아메리카를 알았던 문화는 없었으며, 아메리카에서도 아프로아시아를 알지 못했다. 낯선 지역은 그냥 빼버리거나 상상 속의 괴물이나 불가사의로 멋대로 채워놓았다. 이런 지도에는 빈 공간이 없었다. 이런 지도들은 세계 전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15~16세기에 유럽인들은 빈 공간이 많은 세계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유럽인의 제국주의 욕구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빈 지도는 심리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비약적인 진전이었다.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세계의 많은 부분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중대한 전환점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동아시아를 행한 새 항로를 찾기 위해서 스페인을 떠나 서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한 1492년에 왔다. 콜럼버스는 여전히 과거의 '완전한' 세계지도를 믿고 있었다. 그런 지도를 이용한 콜럼버스의 계산에 따르면, 일본은 스페인에서 7천 킬로미터 서쪽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 동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거리는 2만 킬로미터가 넘으며, 중간에는 완전한 미지의 대륙이 가로막고 있었다.

1492년 10월 12일 오전 2시쯤 콜럼버스 탐험대는 미지의 대륙과 맞닥뜨렸다. 핀타 호의 돛대에서 관측하던 후안 로드리게스 베르메호는 섬을 하나 발견하고는 외쳤다. "육지다! 육지다!" 오늘날 우리가 바하마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동아시아 연안의 작은 섬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인도 제도에 - 오늘날 우리가 동인도 제도 혹은 인도네시아 군도라고 부르는 곳이다 - 상륙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발견한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콜럼버스는 평생 그렇게 오해했다. 완전히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는 생각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의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사상가와 학자뿐 아니라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성경까지도 수천 년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밖에 몰랐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틀렸을 수 있을까? 성경이 세계의 절반을 몰랐을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1969년 달을 향해 비행하던 아폴로 11호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때까지의 관측에서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달과 충돌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콜럼버스는 여전히 중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계 전체를 안다고 확신했으며, 심지어 스스로 이룬 기념비적인 발견도 그 확신을 흔들지 못했다.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그는 1499년~150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아메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선원이었다. 1502년부터 1504년 사이, 그 탐험의 내용을 담은 두 건의 문서가 유럽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베스푸치로 되어 있었다. 이들 문서의 주장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은 동아시아 연안의 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었다. 성경이나 고전 지리학자나 동시대 유럽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1507년, 이런 주장을 확고하게 믿은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최시판 세계 지도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 선단이 착륙했던 곳을 별개의 대륙으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였다. 대륙을 그려 넣은 발트제뮐러는 이름을 부여해야 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라고 잘못 알고 있던 터라, 이 대륙에 아메리고를 기리는 이름을 붙였다. 아메리카라고. 발트제뮐러의 지도는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복제되었다. 그가 새 땅에 부여한 이름도 함께 퍼져나갔다. 세계의 4분의 1에, 즉 일곱 대륙 중 두 곳에 거의 무명이던 이탈리아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가 유명할 이유라고는 "우리는 모른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던 점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에는 어떤 시적 정의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전통보다 지금의 관찰 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메리카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방대한 새 영토를 통제하기를 원한다면 신대륙의 지리, 기후, 식물상, 동물상,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해서 막대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기독교 성경이나 옛 지리서, 고대 구비 전통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유럽의 지리학자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학자들은 채워 넣을 공백이 있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론이 완전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들 가운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인들은 마치 자석처럼 지도에서 비어 있는 곳들로 이끌렸고 공백을 신속하게 채워 넣기 시작했다,, 15~16세기 동안 유럽 탐험대는 아프리카를 일주하고, 아메리카를 답사했으며, 태평양과 인도양을 횡단하고, 세계 전역에 그물처럼 기지와 식민지를 건설했다. 우리는 이런 유럽의 탐험 겸 정복 원정대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이들이 얼마나 특이한 존재인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장거리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국지적 분쟁과 이웃과의 불화만으로도 너무 바빴다. 먼 곳의 땅을 탐사하고 정복한다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대제국은 자신과 직접 이웃한 지역으로만 지배권을 확장했다. 제국이 멀리 떨어진 땅에까지 다다른 것은 오로지 이웃 지역이 계속 확장되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이 에트루리아를 정복한 것은 로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기원전 350~300년경), 이어 이들은 포 평원을 방어하기 위해 프로방스를(기원전 200년경), 프로방스를 지키기 위해 갈리아를(기원전 50년경), 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브리튼 섬(기원후 50년경)을 정복했다. 로마에서 런던까지 넓혀가는 데 4백 년이 걸렸던 것이다. 기원전 350년에 배를 타고 곧바로 브리튼 섬으로 가서 점령할 생각을 한 로마인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가끔 야망에 찬 지배자나 모험가가 장거리 정복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그런 군사작전은 잘 닦인 제국의 도로나 상업용 도로를 타고 이루어졌다. 가령 알렉산드로 대왕의 군사작전은 새 제국의 건설이 아니라 기존 제국 페르시아의 찬탈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근대 유럽 제국에 가장 근접한 선례는 고대 해상제국들이었던 아테네와 카르타고, 14세기 인도네시아의 많은 영역을 지배했던 중세의 마자파힛 해상제국이었다. 하지만 이런 제국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바다로 향하는 드물었다. 이들 해군의 무훈은 근대 유럽인들의 글로벌 벤처에 비하면 국지적 프로젝트에 불과했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 명 왕조의 정화 제독이 벌인 대항해가 유럽인들의 발견의 항해를 예고했으며 그 못지않은 성취였다고 주장한다. 정화 제독은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대함대를 이끌고 중국에서 인도양의 먼 곳까지 항해했다. 가장 규모가 컸던 함대는 3백 척에 가까운 배에 3만 명 가까운 인원이 탑승했다. 함대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페르시아 만, 홍해, 동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중국 배들은 헤자즈(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의 홍해 연안 지방 - 옮긴이)의 주요 항구인 제다와 케냐 연안의 말린디 항구에까지 닻을 내렸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선단 - 세 척의 작은 배에 120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 은 정화의 용 떼에 비하면 모기 세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했다. 정화 제독은 대양을 탐험하고 각국으로 하여금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방문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정화의 원정은 중국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 아니었다. 1430년대 베이징의 지배 파벌이 바뀌자 새로 등장한 거물들은 갑자기 작전을 중단시켰다. 대함대는 해체되었고, 중요한 기술적, 지리학적 지식은 단절되었다. 그 후 중국의 항구에서 그 같은 위상과 자신을 지닌 탐험대가 항해를 떠난 일은 다시없었다. 이후 중국의 지배자들은 이전 세기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중원에 인접한 영역으로 관심과 야망을 제한했다.

정화 제독의 원정은 유럽이 뛰어난 기술적 우위를 누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유럽인들이 이례적인 점은 탐험과 정복의 야망이 어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이 탐욕스러웠다는 데 있었다. 로마인들은 설사 그럴 능력이 있었다고 해도 인도나 스칸디나비아의 정복을 꾀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인들도 마찬가지로 마다가스카르나 스페인 정복을 시도하지 않았다. 중국인들도 인도네시아나 아프리카를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의 지배자 대부분은 이웃 일본마저도 그들 뜻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다. 여기에는 별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근대 초기 유럽인들이 걸린 열병이었다. 그 열병은 그들로 하여금 낯선 문화가 가득한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항해하여, 그 해변에 한 발 디딘 뒤, 즉각 이렇게 선언하게끔 만들었다. "이 땅은 모두 우리 왕의 것이다!"



외계로부터의 침공

1517년경 카리브 제도에 있던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멕시코 본토 중심부 어딘가에 강력한 제국이 있다는 막연한 소문을 들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뒤에 아즈텍의 수도는 잿더미가 되었고, 아즈텍 제국은 무너졌으며,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에 건설된 광대하고도 새로운 스페인 제국을 통치했다, 스페인인들은 여기서 멈추고 자축하거나 숨을 고르지 않았다. 이들은 즉각 사방으로 탐험 겸 정복 작전을 벌였다. 기존에 중미를 지배하던 아즈텍, 톨텍, 마야 족 등은 과거 2천 년 동안 남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으며 그것을 복속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한 지 10년이 조금 지난 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남미에서 잉카 제국을 발견했고, 1532년 이를 정복했다.

만일 아즈텍인과 잉카인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다면 - 그리고 스페인인들이 자신들의 이웃에게 한 짓을 알았더라면 - 이들은 스페인의 정복에 좀 더 격렬하고도 성공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첫 항해(1492년)와 코르테스의 멕시코 상륙(1519년) 사이 시기에 스페인인들은 카리브 제도의 섬 대부분을 정복해 일련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복당한 원주민들에게 식민지는 지상의 지옥이었다.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들을 노예로 삼아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광산과 대규모 농장에서 일을 시키면서 누구든 약간이라도 저항하면 무조건 죽여버렸다. 원주민 대부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열약한 작업 환경과 정복자의 범선에 무임승차해 온 질병 바이러스 탓이었다. 카리브해의 원주민 거의 모두가 20년 만에 사라졌다.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인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인종청소는 아즈텍 제국의 바로 코앞에서 일어났지만 코르테스가 제국의 동부 연안에 상륙했을 때 아즈텍인들은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우주에서 침공해 온 외계인 같았다. 아즈텍 사람들은 스스로 온 세상을 다 알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이 오늘날의 베라크루스 항구에 해당하는 화창한 해변에 상륙한 사건은 아즈테인들이 완전히 미지의 사람들과 조우하는 첫 사례였다.

아즈텍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아는 모든 인간과 달리 이들 외계인은 피부가 희고 얼굴에는 털이 많았다. 태양빛 머리칼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악취가 났다.(당시 스페인인들보다 원주민의 위생상태가 훨씬 나았다. 스페인인들이 처음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은 향로를 든 원주민을 배정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게 했다. 스페인인들은 그것을 신성한 영예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지만, 원주민의 자료를 통해 알게 된 바 그것은 원주민들이 새로 나타난 인간들의 악취를 견딜 수 없어서였다)

외계인의 물질문화는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이들이 타고 온 거대한 배는 보기는커녕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이들이 타고 다니는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동물(말을 가리킨다 - 옮긴이)은 바람처럼 빨랐다. 이들은 또 번쩍이는 금속 막대로 번개와 천둥을 만들 능력이 있었다. 빛나는 긴 칼과 뚫을 수 없는 갑옷이 있었는데, 이에 맞서면 원주민의 나무칼이나 부싯돌 촉을 단 창은 무용지물이었다.

이들을 신이라고 믿는 아즈텍인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악마나 죽은 자의 유령, 강력한 마법사라고 주장했다. 아즈텍인들은 모든 역량을 집결해 스페인인을 쓸어버리는 대신에 심사숙고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협상을 벌였다. 이들에게는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코르테스에게는 스페인인이 550명밖에 없었다. 550명이 수백만 명이 사는 제국을 상대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코르테스 역시 아즈텍인들에 대해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와 그의 부하들은 적에 비해 중대한 우위를 하나 점하고 있었다. 아즈텍인들은 이상한 생김새에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외계인의 도래에 대비한 경험이 없었다. 이에 비해 스페인인들은 지구상에 미지의 영역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미지의 땅을 침공해서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상황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그들보다 더 경험 많은 족속은 없었다. 근대 유럽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근대 유럽의 정복자들에게 미지를 향해 뛰어드는 것은 매우 신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코르테스는 1519년 7월 그 화창한 해안에 닻을 내렸을 때 주저하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다. 마치 우주선에서 내린 과학소설 속 외계인처럼, 그는 자신들에게 경외심을 품은 현지인에게 말했다. "우리는 평화적인 목적으로 왔다. 너희 지도자에게 우리를 안내하라." 코르테스는 자신을 위대한 스페인 왕의 평화사절이라고 소개하고, 아즈텍의 지배자 몬테주마 2세에게 외교 접견을 요청했다(이는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코르테스는 탐욕스러운 탐험가들의 독립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다. 스페인 왕은 코르테스에 대해서도 아즈텍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코르테스는 자신의 직인 아즈텍 현지인들로부터 길잡이와 음식, 약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어서 그는 아즈텍의 수도이자 대도시인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행진했다. 아즈텍인들은 외계인들이 수도까지 행진하게 놔두었고, 그 지도자를 공손하게 몬테주마 2세에게 인도했다. 접견 도중 코르테스가 신호를 보내자, 강철무기를 지닌 스페인인들이 몬테주마 2세의 경비병을 학살했다(이들의 무기는 나무 곤봉과 돌칼밖에 없었다). 귀빈이 주인을 포로로 잡은 것이었다.

코르테스는 이제 매우 미묘한 상황에 놓였다. 황제를 포로로 잡았지만, 성난 적군 전사 수십만 명과 적대적인 민간인 수백만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자기를 둘러싼 대륙 전체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는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의 수하에 있는 병력은 스페인인 몇백 명뿐이었고, 가장 가까운 증원군은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무바에 있었다.

코르테스는 몬테주마 2세를 궁전 안에 감금해 두고서, 마치 왕은 포로로 잡히지 않았으며 '스페인 대사'는 손님에 지나지 않는 척 가장했다. 아즈텍 제국의 통지초직은 극도로 중앙집권적이었으며, 이런 전대미문의 사태는 이 조직을 마비시켰다. 몬테주마 2세는 자신이 여전히 제국을 지배하는 척 행동했으며, 아즈텍의 엘리트들은 계속해서 그의 명을 따랐다. 즉 코르테스의 명을 따른 셈이었다. 이런 상황은 여러 달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코르테스는 몬테주마 2세와 그의 하인들을 심문하고 다양한 현지 언어를 구사하도록 통역자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탐사대를 사방으로 파견했다. 아즈텍 제국과 제국이 통치하는 다양한 부족들, 사람들, 도시들에 대해 미리 알아두기 위해서였다.

아즈텍 엘리트들은 결국 코르테스와 몬테주마 2세에게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선출한 뒤, 테노치티블란에서 스페인인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이제 제국의 조직에는 수많은 균열이 생겼다. 코르테스는 그동안 얻은 지식을 이용해 그 균열을 더욱 크게 벌리고, 제국이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는 제국의 많은 피지배 민족들을 설득해, 그의 편에 서서 아즈텍의 엘리트 지배층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피지매 민족들은 심각한 착오를 저질렀다. 이들은 아즈텍을 증오했지만, 스페인에 대해서도 카리브해의 인종학살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이들은 스페인의 도움을 받으면 아즈텍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스페인인들이 지배권을 장악하리란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만일 코르테스나 몇백 되지 않는 그의 부하들이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키면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반란에 가담한 민족들은 코르테스에게 수십만 명의 현지인 군대를 제공했으며, 그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하고 정복했다. 이 단계에서 점점 더 만흥 스페인 군인들과 정착자들이 멕시코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쿠바에서, 나머지는 스페인에서 들어왔다. 현지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항에 상륙한 지 1세기 만에, 아메리카의 원주민 수는 90퍼센트가량 줄었다. 주로 침략자들과 함께 유입된 생소한 질병 탓이었다.

생존자들은 아즈텍보다 훨씬 극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인종차별적인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한 지 10년 후, 피사로는 잉카 제국 연안에 도착했다. 그가 데려간 군대는 코르테스보다 훨씬 더 적어 원정대원의 숫자는 168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사로는 지난 침략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큰 이점을 누렸다. 그에 비해 잉카는 아즈텍의 운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를 모방했다. 그는 스스로 스페인 왕의 평화사절이라고 선언하고, 잉카의 지배자 아타후알파를 초대했다. 그러고는 외교 접견 자리에서 그를 납치했다. 피사로는 마비된 제국을 현지 동맹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복해 나갔다. 만일 잉카 제국의 피지배 민족들이 멕시코 주민들의 운명을 알았더라면, 침략자들과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협소한 시각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른 민족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아시아의 대제국 - 오토만, 사파위, 무굴, 중국 - 은 유럽인들이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매우 신속하게 전해 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발견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은 세상이 여전히 아시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다. 아메리카나 대서양 태평양의 새로운 원양 항로의 지배권을 놓고 유럽인들과 경쟁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스코틀랜드나 덴마크 같은 작은 왕국조차 아메리카에 몇몇 탐험 겸 정복 원정대를 보냈지만, 이슬람 세계나 인도나 중국에서 보낸 원정대는 하나도 없었다.

아메라카에 군사원정대를 보내려 했던 최초의 비유럽 국가는 일본이었다. 1942년 6월 일본 원정대는 알래스카 해안에 있는 작은 섬인 키스카와 아투를 정복하여, 미국 군인 열 명과 개 한 마리를 포획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본토로 그 이상 더 들어가진 않았다.

터키인이나 중국인들이 너무 먼 곳에 있었다거나 기술적, 경제적, 군사적 수단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1420년대 정화 제독을 동아프리카까지 보냈던 자원이면 아메리카까지 도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저 관심이 없었다. 아메리카를 보여주는 최초의 중국 지도는 1602년 발행되었는데, 이조차도 유럽 선교사들이 한 일이었다.

유럽인들은 3백 년 동안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경쟁자가 없는 지배권을 누렸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한 분쟁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유럽인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와 자원 덕분에 아시아도 침공하고, 그 제국들을 패배시키고, 자기들끼리 나눠 가질 수 있었다. 터키, 페르시아, 인도, 중국인들이 깨어나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비유럽 문화권들이 진정 세계적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는 유럽이 헤게모니를 잃게 된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에서 알제리 게릴라들은 압도적인 수적, 기술적, 경제적 우위를 점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알제리인들이 승리한 것은 전 지구적인 반식민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었으며, 전 세게 미디어를 동원해 자신들의 명분을 알리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또한 프랑스 자체 내의 여론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줄 알았다. 작은 북베트남이 미국이란 거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이와 유사한 전략을 기반으로 한 덕분이었다. 만일 국지적 전투가 전 지구적 대의명분의 대상이 된다면 초강대국이라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 게릴라군은 보여주었다. 만일 몬테주마 2세가 스페인의 여론을 조작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스페인의 라이벌인 포르투갈이나 프랑스, 혹은 오토만 제국에게 지원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희귀 거미와 잊힌 문자

근대 과학과 근데 제국에 동기를 부여한 것은 뭔가 중요한 것이, 자신들이 탐사해서 정복하면 좋을 것 같은 무언가가 지평선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들썩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과학과 제국의 연계는 훨씬 더 깊은 수준까지 나아갔다. 제국 건설자들의 동기뿐 아니라 관행도 과학자들의 그것과 얽혀 있었던 것이다. 근대 유럽인에게 제국 건설은 과학적 프로젝트였고, 과학이란 분과를 건설하는 것은 제국의 프로젝트였다. 무슬림이 인도를 정복했을 대, 이들은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고고학자, 문화를 연구할 인류학자, 땅을 연구할 지리학자, 동물상을 연구할 동물학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영국은 인도를 정복하면서 이 모두를 데리고 왔다. 1802년 4월 10일 인도 대측량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60년간 지속되었다. 수만 명의 현지 노동자와 학자,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영국은 인도 전체의 지도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국경선을 표시하고 거리를 측정했으며 심지어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봉우리들의 정확한 높이를 최초로 측량하기까지 했다. 영국은 인도 각지의 군사적 자원을 탐사하고 금광의 위치를 조사했지만, 그뿐 아니라 희귀 인도 거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화려한 나비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사멸한 고대 인도 언어들의 기원을 추적하고, 잊힌 유적지를 발굴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모헨조다로는 인더스강 유역 문명의 주요 도시중 하나로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사이 번성했다가 기원전 1900년경 파괴되었다. 영국 이전에 인도를 지배했던 어떤 왕조도, 마우리아 오아조나 굽타 왕조도, 델리의 술탄이나 위대한 무굴 제국도 그 유적지에 관심을 가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영국 고고학 조사단은 1922년에 주의를 기울였다. 영국 조사단은 그곳을 발굴해, 최초의 위대한 인도 문명을 발견했다. 인도인 누구도 모르고 있던 문명을 말이다.

영국의 과학적 호기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사례는 설형(쐐기) 문자로 된 문서의 해독이다. 그 문자는 3천 년 가깝게 중동 전역에서 사용되던 주요 문자였지만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마지막 인물은 기원호 첫 천 년 초기의 어느 시기엔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지역 주민들은 기념물이나 비문, 고대 유적, 깨진 항아리에서 자주 그 문자와 마주쳤지만, 뾰족하게 생긴 이상야릇한 긁힌 자국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전혀 몰랐으며 우리가 아는 한 읽으려고 시도한 일도 없었다.

설형문자가 유럽인의 관심을 끈 것은 1618년이었다. 페르시아 주재 스페인 대사가 고대 페르세폴리스의 유적지로 관광을 갔다가 돌에 새겨진 글씨를 보았는데, 아무도 그 내용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미지의 문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의 유명 학자들 사이에 퍼졌고, 그들은 호기심이 동했다. 1657년 유럽 학자들은 페르세폴리스에서 나온 설형문자 텍스트의 첫 필사본을 펴냈다. 이후 점점 더 많은 텍스트가 출간되었고, 거의 2세기 동안 유럽 학자들은 그것을 해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1830년대에, 헨리 콜린슨이라는 영국인 장교는 그곳의 샤(국왕을 말한다 - 옮긴이)가 군대를 유럽식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돕는 임무를 띠고 페르시아로 파견되었다. 롤린슨은 여가 시간에 페르시아 여기저기를 여행했다. 어느 날 현지 안내인이 그를 자그레스 산맥의 절벽으로 이끌어서 거대한 베히스툰(이란 서부의 마을 - 옮긴이) 비문을 보여주었다. 높이 15미터, 폭 24미터에 이르는 비문은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 왕의 지시에 따라 절벽 수직면 높은 곳에 새겨진 것이었다. 이것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의 세 언어를 설형문자로 써둔 것이었다. 현지인들은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읽을 수는 없었다.

롤린슨은 만일 자신이 이 글을 해독할 수 있다면 당시 중동 전역에서 발견되던 수많은 명문과 문서를 자신과 다른 학자들이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렇게 되면 잊힌 고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열리는 것이었다. 이들 문자를 해독하는 첫 단계는 유럽으로 가져갈 수 있는 정확한 사본을 만드는 것이었다. 롤린슨은 이를 위해 죽음을 무릅썼다. 이상한 문자를 복사하기 위해 가파른 벼랑을 오른 것이었다. 그는 현지인을 여럿 고용해 자신을 돕게 했는데, 그중 한 쿠르드족 소년은 절벽에서 가정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올라가 비문 윗부분의 탁본을 떠냈다. 이 포로젝트는 1847년 완료되었고, 완벽하고 정확한 사본이 유럽으로 보내졌다.

롤린슨은 그 업적을 즐기고만 있지 않았다. 장교로서 수행해야 할 군사적, 정치적 임무가 있었지만, 여유가 있을 때마다 비밀 문자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런저런 방법을 차례대로 써보다가 결국에는 비문의 고대 페르시아어 부분을 어찌어찌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가장 쉬운 부분이었다. 고대 페르시아어는 롤린슨이 잘 알던 근대 페르시아어와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어 부분을 이해하자, 그는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 부분을 판독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손에 주리 수 있었다. 장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고대의 생생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수메르 시장의 부산함, 아시리아 왕들의 포고문, 바빌로니아 관료들의 논쟁...... 롤린슨 같은 근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고대 중동 제국들의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제국주의 학자는 윌리엄 존스였다. 그는 1783년 9월 벵골 최고법원의 판사로 봉직하기 위해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는 부임 6개월 만에 '아시아 협회'를 세웠다. 아시아, 그중에서도 인도의 문화, 역사, 사회를 연구하는 단체였다. 그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산스크리트어>를 출간했다. 이것은 비교언어학의 출범을 알리는 기념비적 서적이었다. 여러 저서에서 존스는 고대 인도어로서 힌두교 의례에 쓰이는 신성한 언어가 된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겋ㅅ을, 그뿐 아니라 이들 언어가 고트어, 켈트어, 고대 페르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와도 비슷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가령 산스크리트어로 '엄마'는 'matar'인데 라틴어로는 'mater', 고대 켈트어로는 'mathir'였다. 존스는 이 모든 언어는 기원이 같았을 것이며 지금은 잊힌 고대의 한 조상언어로부터 발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인도유럽어족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존스의 연구는 비단 대담한(그리고 정확한) 가설일 뿐 아니라 그가 언어들을 비교하기 위해서 개발한 정연한 방법론 때문에도 기념비적 업적이었다. 이 방법론은 다른 학자들에게 채택되어, 세계 모든 언어의 발달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활용되었다. 제국들은 언어학자들을 열성적으로 지원했다.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면 피지배자들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유럽 제국들의 생각이었다.

인도에 부임하는 영국 장교들은 길게는 3년간 콜카타 대학에서 공부해야 했다. 여기서 영국법과 함께 힌두법과 무슬림법을, 그리스어 및 라틴어와 함께 산스크리트어, 우르드어, 페르시아어를, 수학, 경제학, 지리학과 함께 타밀, 벵골, 힌두스탄 문화를 배워야 했다. 언어학 공부는 현지어의 구조와 문법을 이해하는 데 더할 수 없이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윌리엄 존스나 헨리 롤린슨 같은 사람들의 업적 덕분에 유럽 정복자들은 자신의 제국을 매우 잘 알았다. 그 이전의 어느 정복자보다도, 심지어 원주민들보다도 훨씬 더 깊이.

그런 지식이 없었다면, 우스울 정도로 적은 숫자였던 영국인이 수억 명의 인도인을 2세기에 걸쳐 지배, 억압, 착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세기 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최대 3억 명에 이르는 인도인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데는 5천 명이 채 되지 않는 장교, 4만~7만 명의 사병 그리고 사업가들, 떡고물을 바라는 한량들,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다 합한 10만 명의 민간인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실질적 이점 때문에만 제국들이 언어학, 식물학, 지리학, 역사학 연구에 자금을 댄 것은 아니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과학이 제국에게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근대 유럽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언제나 선이라고 믿게 되었다. 제국에서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덕분에, 제국에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업이란 이미지가 붙었다. 심지어 오늘날에고 지리학, 고고학, 식물학 같은 과학의 역사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라도 유럽 제국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식물학의 역사에는 호주 원주민의 고통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지만 제임스 쿡이나 조지프 뱅크스에 대한 호의적인 말은 몇 마디 있는 게 보통이다.

게다라 제국에 의해 축적된 새로운 지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피지배 민족을 이롭게 하고 이들에게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의료와 교육을 제공하고, 철로와 운하를 건설하며, 정의와 번영을 보장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제국이 거대한 착취 사업이 아니라 비유럽 인종을 위해 시행된 이타적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이를 '백인의 짐'이라고 표현했다. "백인의 짐을 받아들여라. / 너희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식들을 보내라. / 이들에게 유배생활의 의무를 지워라. / 너희가 정복한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온갖 장비를 무겁게 걸치고, 몸을 떠는 종족과 야만의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 반은 악마이고 반은 어린이인 / 침울한 사람들을 위해."

물론 이런 신화가 거짓임은 종종 폭로되었다. 1764년 영국은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벵골 지방을 정복했다. 새 지배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부유해지는 데만 쏠려 있었다. 이들은 파멸을 초래하는 경제정책을 채택했고, 이 정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벵골 대기근을 낳았다. 기근은 1769년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파국적인 수준에 도달해 17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재앙으로 벵골 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사실은 압제와 착취의 이야기도, 백인의 짐 이야기도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유럽 제국들은 너무나 큰 규모로 다양하고 수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무슨 주장에 대해서든 그에 맞는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 제국들은 세계 곳곳에 죽음과 압제와 불의를 퍼뜨리는 사악하고 기괴한 집단이었을까? 그렇다고 믿는 ㅎ사람은 이들이 저지른 범죄로 백과사전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제국이 사실은 새로운 의학, 더 나은 경제적 형편, 더 큰 안보를 제공해서 피지배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했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그런 업적으로 채워진 백과사전도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제국들은 과학과 긴밀히 협력했던 덕에 엄청난 힘을 발휘했고 세계를 엄청나게 바꾸어놓았으므로, 이들에게 간단히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다. 제국들은 우리가 아는 세상을 창조했고, 여기에는 우리가 그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된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과학을 좀 더 사악한 목적에도 사용했다. 생물학자, 인류학자, 심지어 언어학자들까지 유럽인들은 다른 모든 인종에 비해 우월하며 따라서 이들을 지배할 권리(아마도 의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를 가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했다. 윌리엄 존스가 모든 인도-유럽어는 고대의 단일 언어의 후예라고 주장한 이래, 많은 학자들은 그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찾으려 애써왔다. 학자들은 최초의 산스크리트어를 말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3천여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침공했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리아라고 불렀다는 데 주목했다. 가장 초기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이리이아로 지칭했다.

그래서 유럽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 모두를(그뿐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고트어, 켈트어를) 탄생시킨 원시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리안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위대한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이 모두 아리아인이라는 것이 우연일까? 그다음 영국, 프랑스, 독일의 학자들은 근면한 아리아인들에 대한 언어학적 이론을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아리아인이 단순한 언어 집단이 아니라 생물학적 실체 - 인종 -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더구나 그저 그런 인종이 아니라 지배인종,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밝은 색이며, 눈이 파랗고, 근면하며, 지극히 이성적이고, 온 세상의 문화의 기초를 놓기 위해 북방의 안갯속에서 출현한 인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도와 페르시아를 침공한 아리아인들은 현지 원주민과 결혼을 해서 흰 피부와 금발 머리를 잃었으며, 이와 함께 합리성과 근면성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의 문명은 쇠퇴했다. 한편 유럽에선 아리아인이 인종적 순수성을 보존했다,.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이들이 지배에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열등한 인종과 섞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런 인종주의 이론은 여러 세대 동안 명성과 존경을 얻었고 서구의 세계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러다 20세기 후반에 서구 열강이 무너지듯 인종주의는 과학자와 정치인 모두에게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서구가 우월하다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형태로 변했을 뿐이다. 인종주의가 이제는 '문화주의'로 대체된 것이다. 사실 '문화주의'란 말은 없지만, 이제 만들어낼 때가 되었다.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보다는 문화 간의 역사적 차이라는 측면에서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건 그들이 타고난 속성이야"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건 그들의 문화 탓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무슬림의 유럽 이민에 반대하는 유럽 우파 정당는 보통 인종차별적 용어를 피하려고 조심한다. 만일 마린 르 펜(1968-프랑스 국민전선 당대표 - 옮긴이)의 연설문 작성자가 국민전선 당수에게 TV에 출연해 "우리는 열등한 셈족이 우리의 아리아인 혈통을 희석시키고 우리의 아리아 문명을 손상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라고 제안한다면, 그 작성자는 당장 해고될 것이다.

대신 프랑스 국민전선, 네덜란드 자유당, 오스트리아의 미래를 위한 동맹 등등은 유럽에서 진화한 서구 문화의 특징은 민주적 가치, 관용, 양성 평등인 데 반해 중동에서 발전한 이슬람 문화는 계급제 정치와 광기와 여성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두 문화는 매우 다르고, 많은 무슬림 이민자들은 서구적 가치를 따르기를 원치 않으므로(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내분을 조장하고 유럽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부식시키지 못하게 하려면 애초에 입국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화주의적 논쟁은 이른바 문명의 충돌과 다른 문화들 간의 근본적 차이들을 강조하는 인문학 및 사회과학 분야의 과학적 연구들을 재료로 삼는다. 모든 역사학자나 인류학자가 이런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치적 활용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이 현재 인간집단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는 미미하다고 말함으로써 인종주의를 간단히 기각할 수 있는 데 비해, 역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그렇게 쉽게 문화주의를 기각할 수 없다. 무엇보다 만일 인간문화 사이의 차이가 미미하다면, 우리가 왜 역사학자와 인류학자에게 그 미미한 차이를 연구하라고 자금을 지원해야 한단 말인가?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이런 기여가 없었다면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정복자들은 과학자들에게 정보와 보호를 제공하고 온갖 종류의 이상하고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지구 구석구석에 과학적 사고방식을 퍼뜨림으로써 보답했다. 제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근대 고학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과학 분야 중에 제국주의적 성장의 하인으로서 삶을 시작하지 않은 분야, 육군 장교와 해군 함장과 식민지 총독의 넉넉한 지원에 대부분의 발견과 수집과 건물과 연구 자금을 빚지지 않은 분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과학은 제국만이 아니라 다른 제도들의 지원도 받았다. 그리고 유럽 제국의 발흥에는 과학 이외의 요인들도 크게 기여했다. 과학과 제국의 일약 성공 뒤에는 특히 중요한 힘 하나가 숨어 있었다. 자본주의다. 만일 돈을 벌려는 사업가들이 없었더라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제임스 쿡은 호주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며,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그 작은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