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과학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542~555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필사와 단상]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지난 5백 년은 깜짝 놀랄 만한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지구는 단일한 생태적, 역사적 권역으로 통일되었다. 경제는 지수적으로 성장했으며, 오늘날 인류는 예전이라면 동화에서나 들어보았을 부를 누리고 있다. 과학과 산업혁명 덕분에 인류는 초인적 힘과 실질적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 사회질서는 완전히 바뀌었으며 정치, 일상생활, 인간의 심리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지난 5세기 동안 인류가 쌓아온 부는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만족을 주었는가? 무한한 에너지원의 발견은 우리 앞에 무한한 행복의 창고를 열어주었는가?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지혁명 이래 험난했던 7만 년의 세월은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것으로 만들었는가? 바람 없는 달 표면에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던 닐 암스트롱은 3만 년 전 쇼에 동굴에 손자국을 남겼던 이름 모를 수렵채집인보다 더 행복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농업과 도시, 글쓰기와 화폐 제도, 제국과 과학,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역사학자는 드물다. 역사학자들은 우루크와 바빌론의 시민이 자신들의 수렵채집인 선조보다 행복했을까, 이슬람교가 등장해서 이집트인들의 삶이 더욱 만족스러워졌을까, 아프리카에서 유럽 제국이 붕괴한 것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역사를 향해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다. 현대 이데올로기와 정치 프로그램 대부분은 무엇이 진정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민족주의자는 정치적 자기 결정권이 우리 행복에 필수요소라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행되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자본주의자는 오로지 자유시장만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시장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립적이고 기업가적인 진취성을 갖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만일 진지한 연구조사 결과 이런 가정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어떨까? 만일 경제성장과 자립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이점은 무엇일까? 만일 대제국의 신민이 독립국의 신민보다 일반적으로 더 행복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예컨대 가나 사람들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때가 내부에서 자라난 독재자의 지배를 받을 때보다 더 행복했던 것으로 판명된다면 어찌 되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탈식민지화 과정에 대해, 민족자결의 가치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 모두는 가설적 가능성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고사하고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의 역사를 연구했다. 정치, 사회, 경제, 성 역할, 질병, 성적 특질, 식량, 의복..... 하지만 이것들이 인류의 행복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멈춰서 생각하는 일은 드물었다.
행복의 장기적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드물지만, 거의 모든 학자와 보통 사람이 여기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역사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은 계속 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소망을 충족하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시대의 선조에 비해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이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병과 착취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아이디어와 기술과 농작물을 이동, 순환시키고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한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인간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로 보인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의 결과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농업으로, 그다음에 산업으로 이행한 탓에,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가장 깊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수렵재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다. 새로운 발명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떨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발명의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보려는 낭만적 고집은 진보가 필연이라는 믿음에 못지않게 교조적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수렵채집인과 접촉이 끊겼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난 2세기 동안 발전한 현대의학 덕분이 어린이 사망률은 33퍼센트에서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이 사실이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더라면 사망했을 어린이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보다 좀 더 미묘한 것은 중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력과 행복 간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중세 농부는 실제로 그들의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스스로의 능력을 더욱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현대 의학의 승리는 한 예에 불과하고, 이외에도 전대미문의 성취가 많다. 폭력은 급격히 줄었고, 국제전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대규모 기근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 또한 과도한 단순화다. 첫째, 낙관적 평가의 표본으로 삼은 기간이 너무 짧다. 인류 대다수가 현대 의학의 결실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고,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대규모 기근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상당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58~1961년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 당시 1천만~5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제전이 드물어진 것은 1945년 이후에 와서였는데 대체로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절멸할 위협이 새로 등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최근 몇십 년이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황금시대였지만,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대변하는 현상인지 아니면 단명할 행운의 회오리바람에 불과한지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현대성을 판단할 때 21세기 서구 중산층의 시각을 취하려는 유혹을 크게 느끼지만, 우리는 19세기 웨일스의 광산 노동자, 중국의 아편 중독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주민 트루가니나는 호머 심슨(미국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가족>의 등장인물-옮긴이)보다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둘째, 지난 반세기는 짤막한 황금시대였는데 이것조차 미래에 파국을 일으킬 씨를 뿌린 시기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될지도 모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지구의 생태적 균형을 수없이 많은 새로운 방법으로 교란해 왔으며, 이것이 끔찍한 결과를 빚고 있는 중인듯하다. 우리가 무모한 소비의 잔치를 벌이면서 인류 번영의 기초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증거는 많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물권리 운동가들의 주장을 10분의 1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행복이 주로 건강이나 식사, 부와 같은 물질적 요인의 산물인 것처럼 이야기해 왔다. 사람들이 더 부유하고 건강해지면 더 행복할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잠깐, 그게 정말 그렇게 명백한 일일까? 철학자, 사제, 시인들이 행복의 본질을 수천 년간 곰곰이 생각해 온 결과, 그들은 우리의 사회적, 윤리적, 정신적 요인들도 물질적 조건만큼이나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지었다. 어쩌면 현대의 풍요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소외와 무의미 때문에 크게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보다 잘살지 못했던 선조들이 공동체, 종교, 자연과의 결합 속에서 커다란 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최근 몇십 년간 심리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무엇이 실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도전에 나섰다. 그것은 돈일까, 가족일까, 유전일까 아니면 덕성일까?
과제의 첫 단계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주관적 안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행복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내 삶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즉각적인 기쁜 감정이나 장기적인 만족감이다. 그것이 내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면 어떻게 외부에서 측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람들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느냐고 물어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의 행복감을 평가하려는 심리학자와 생물학자는 설문지를 나눠주고 그 결과를 계산한다. 주관적 안녕을 묻는 전형적 설문지는 인터뷰 대상에게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동의하는 정도를 0에서 10 사이의 척도로 평가하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런 모습이라는 데 만족한다." "삶은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래를 낙관한다." "삶은 좋은 것이다." 연구자는 모든 답의 점수를 합산해서 인터뷰 대상이 느끼는 주관적 안녕의 전반적 수준을 계산한다. 그러고는 그 결과를 써서 행복을 다양한 객관적 요인과 연관시켜 본다. 연봉 10만 달러를 받는 사람 1천 명과 5만 달러를 버는 1천 명을 비교하는 연구가 있다고 하자. 연구 결과 첫 번째 집단의 주관적 안녕 수준이 8.7이고 두 번째 집단의 평균이 7.3에 불과했다면, 부와 주관적 안녕 사이에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는 사람과 독재 체제하에서 사는 사람 중 어느 쪽이 행복한지를 조사할 수도 있고, 기혼자와 독신자, 이혼자, 홀아비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조사는 역사학자에게 과거의 부, 정치적 자유, 이혼율을 검토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만일 민주체제하의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이혼자보다 배우자가 잇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면, 역사가는 지난 몇십 년간의 민주화 과정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데 반해 이혼율의 증가는 그 반대의 경향을 나타냈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는 셈이다. 이런 접근법에 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점을 지적하기 전에 이런 접근법으로 찾아낸 발견을 검토할 가치가 있다.
흥미로운 결론 중 하나는,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까지 만이며, 그 정도를 넘어서면 돈은 중요치 않다. 경제 사다리의 맨 밑에 붙박여 있는 사람의 경우, 돈이 많으면 행복이 커진다. 만일 당신이 식당 아르바이트로 연간 1,200만 원을 벌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인데 갑자기 5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면, 당신의 주관적 안녕은 오랫동안 큰 폭으로 높아진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 빛의 늪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힐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연봉 2억 5천만 원을 받는 대기업 임원이 1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거나 회사 이사회에서 갑자기 연봉을 두 배로 올리기로 결정했다면, 이로 인해 높아진 행복감은 몇 주밖에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험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것은 장기적으로는 기분에 큰 차이를 만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더 세련된 차를 사고,, 저택 같은 집으로 옮기고, 시바스 리갈 12년 산 대신에 밸런타인 30년을 마시는 데 익숙해지겠지만, 이 모든 것은 머지않아 예외가 아닌 일상이 되어버릴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발견은 질병과 행복의 관계다. 질병이 단기적인 행복감을 낮추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행복감을 감소시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뿐인데, 하나는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병이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것이다.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으로 진단을 받은 사람은 단기간 우울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만일 병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이들이 평가하는 주관적 행복은 건강한 사람과 같은 수준이다.
중산층 쌍둥이인 추시와 루크가 주관적 안녕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치자. 심리학 실험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루시의 차가 버스와 부딪치는 사고가 났다. 루시는 뼈가 여러 개 부러졌으며, 한쪽 다리를 영원히 절개되었다. 구조팀이 찌그러진 차를 부스고 그녀를 꺼내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리는데, 그 너머에서 루크가 3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외친다. 2년 후 루시는 다리를 절 것이고, 루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가 추적 연구를 위해 들렸을 때 이들의 행복감에 대한 답변은 사고가 난 2년 전 그날의 것과 동일한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가족과 공동체는 우리의 행복에 돈과 건강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 간에 유대감이 강하고 구성원을 잘 돕는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즉 가족이 제 구실을 못하거나 소속될 공동체를 찾지 못한 이들에 비해서 훨씬 행복하다. 결혼은 특히 중요하다. 좋은 결혼은 행복과, 나쁜 결혼은 불행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각종 연구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경제적 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신체적 조건과도 상관없다. 무일푼의 병자라도 사랑하는 배우자, 헌신적 가족, 따스한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소외된 억만장자보다 행복감이 높다. 다만 병자의 가난이 너무 심하지 않고, 그 병이 퇴행성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지난 2세기 동안 물질적 조건이 크게 개선된 효과가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로 상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평균적 사람이 1800년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자유조차 나쁘게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배우자와 친구, 이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이 각자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데 전례 없이 큰 힘을 누리게 되면서, 우리는 남에게 헌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되고 다들 점점 더 외로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행복이 부나 건강, 심지어 공동체 같은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손수레를 원해서 손수레를 얻었다면 만족하지만, 새 페라리를 원했는데 중고 피아트밖에 가지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복권 당첨이든 끔찍한 자동차 사고든 시간이 지나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비슷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태가 좋아지면 기대도 부풀게 마련이다. 객관적 조건이 극적으로 좋아져도 불만일 수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 기대가 작아지기 마련이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행복감은 이전과 비슷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 위해 심리학자의 숱한 설문지가 필요하지 않다. 예언자, 시인, 철학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의 연구조사 결과에서도 수많은 숫자와 도표의 뒷받침을 받아 옛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간의 기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행복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일 행복이 부나 건강, 사회관계 같은 객관적 조건에만 좌우된다면, 행복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행복이 주관적 기대에 좌우된다는 발견은 역사학자의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현대인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제와 진통제가 얼마든지 있지만, 안락함과 즐거움은 더 크게 기대하면서 불편함과 불쾌함은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가 선조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이런 생각의 노선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우리의 정신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추론의 오류에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현재 얼마나 행복한지, 혹은 과거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추축하고 상상하려 할 때 우리 자신을 그들의 상황에 대입해 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의 기대를 타인의 물질적 조건에 끼워넣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의 풍요 사회에서는 매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관습이다. 대조적으로 중세 농부는 몇 개월간 한 번도 씻지 못했으며, 옷을 갈아입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불쾌하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채로 사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혐오감이 드는 일이지만, 중세 농부는 개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랫동안 세탁하지 않은 셔츠의 촉감과 냄새에 익숙했다.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다. 적어도 의복에 관해서는 만족했다.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침팬지 사촌은 평생 동안 씻는 일이 거의 없으며, 옷도 갈아입지 않는다. 우리도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매일 샤워하거나 코트를 갈아입지 않는다고 해서 혐오감을 느끼기는커녕 거리낌 없이 이들을 토닥이고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풍요로운 사회의 어린이들도 샤워를 싫어하는 일이 흔하다. 다들 멋진 관습이라고 믿고 있는 샤워를 아이들이 받아들이게 만들려면 몇 년에 걸친 교육과 부모의 훈육이 필요하다. 이 모두가 기대의 문제다, 만일 행복이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 -대중 매체와 광고 산업- 은 지구의 만족 저장고를 생각지 않게 고갈시키는 중일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5천 년 전의 어느 마을에 사는 18세 젊은이라면, 아마도 스스로 외모가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을에 남자라고는 50명밖에 안 되고, 대부분은 늙었거나 얼굴에 상처나 주름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아직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오늘날의 십 대 청소년이라면, 스스로 부적격자라고 느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설사 학교에서 만나는 다른 애들이 못생겼다 하더라도 그렇다. 당신은 그 애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TV나 페이스북, 대형 광고판에서 매일 보는 영화배우, 운동선수, 슈퍼모델과 비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의 불만은 단지 가난이나 질병, 부패나 정치적 압제뿐 아니라 제1세계의 규범에 노출된 탓이기도 하지 않을까? 평균적인 이집트인이 기아나 질병, 폭력으로 사망할 확률은 람세스 2세나 클레오파트라의 치하에서보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치하에서 훨씬 더 낮다. 대부분의 이집트인에게 물질적 조건이 이토록 좋았던 시대는 또 없었다. 그렇다면 2011년 이들은 자신들의 행운에 감사하며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었어야 하겠지만, 사실 그들은 무바라크를 축출하기 위해 격렬하게 들고일어났다. 이들은 자신을 파라오 치하의 선조들과 비교한 게 아니라 동시대 부유한 서방국가 사람들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와 같다면,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 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 대다수의 사람- 들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 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 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른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위와 능력의 '힘'으로 행복을 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만행蠻行이다.
행복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주관적 안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행복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내 삶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즉각적인 기쁜 감정이나 장기적인 만족감이다.
"행복은 내 안에 있다", 진부하지만 본질적인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