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과학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556~572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필사와 단상]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사회과학자들은 행복을 묻는 설문지를 배포하고 그 결과를 부나 정치적 자유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과 연관시킨다. 생물학자들도 똑같은 설문지를 사용하지만, 사람들의 응답 결과를 생화학적이고 유전적 요인과 연관 짓는다. 그들이 알아낸 사실은 충격적이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복도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치적 권리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경, 뉴턴, 시냅스 그리고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 등의 다양한 생화학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집을 사거나 승진하거나 심지어 진정한 사랑을 찾거나 하는 일로 행복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인 감각이다. 방금 복권에 당첨되거나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기뻐 날뛰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나 연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혈관 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르몬과 뇌의 여러 부위에서 오가는 전기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
지상에 낙원을 창조하려는 희망을 가진 모든 이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의 내부 생화학 시스템은 행복 수준을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하다. 자연선택은 보통 말하는 의미의 행복을 선호하지 않는다. 행복한 은둔자의 유전적 계통은 끊어질 테지만, 걱정을 많이 하는 부모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질 것이다. 진화에서 행복과 불행이 맡는 역할은 생존과 번식을 부추기거나 그만두게 하는 것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진화의 결과 우리가 너무 불행해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진화는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런 느낌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조만간 이 느낌은 가라앉고, 불쾌한 느낌에게 자리를 내준다.
예를 들어, 진화는 남자로 하여금 임신 가능한 여자와 성관계를 해서 유전자를 퍼뜨리면 쾌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도록 만들었다. 만일 성관계에 따르는 쾌감이 그리 크지 않다면, 힘들여 그런 수고를 하려 드는 남자는 드물 것이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그 쾌감이 재빨리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만일 오르가즘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행복한 남자는 음식에 흥미를 잃은 탓에 굶어 죽고 말 것이고, 다른 임신 가능한 여자를 찾는 수고를 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의 생화학 시스템을 극심한 더위가 다가오는 눈보라가 몰아치든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공조 시스템으로 비교하는 학자도 있다. 사고가 생겨 온도가 일시적으로 바뀔 수는 있지만, 공조시스템은 언제나 온도를 설정된 값으로 되돌려놓는다. 어떤 시스템은 섭씨 25도에 맞춰져 있고, 어떤 시스템은 20도에 맞춰져 있다. 인간의 행복 조절 시스템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1에서 10까지의 척도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다. 그런 사람은 기분이 6에서 10 사이에서 움직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8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은 매우 행복하다. 설령 그가 대도시 변두리에 살며 주식시장 붕괴로 돈을 모두 날리고, 당뇨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더라도 말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울한 생화학 시스템을 가지고 태어난다. 기분은 3에서 7 사이로 움직이고, 5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은 항상 우울하다. 설사 그가 잘 짜여진 공동체의 지원을 받고, 수백만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되며, 국가대표 운동선수 같은 건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의 우울한 친구는 심지어 아침에 5천만 달러 복권에 당첨되고, 정오에는 에이즈와 암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오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를 이룩하고, 저녁에는 여러 해 전에 실종되었던 딸을 찾는다고 해도 행복지수 7 이상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뇌는 애초에 유쾌한 기분과는 거리가 멀게 생겨먹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똑같다.
한번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해 보라.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상대적으로 즐거운 상태를 잘 유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이 그의 발치에 어떤 선물을 놓아주든 항상 언짢은 상태인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직장을 바꾸면, 결혼을 하면, 쓰고 있던 소설을 끝마치면, 새 차를 사면, 융자금을 모두 갚으면...... 그러면 엄청나게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원하는 것을 실제로 얻을지라도 조금도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차를 사거나 소설을 쓰는 것이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생화학 시스템을 흔들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곧 원래의 설정된 값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런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심리학과 사회학의 연구 결과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결혼한 사람은 독신자들보다 행복한 것이 사실 아닌가? 답은 이렇다. 첫째, 이런 연구 결과들은 상관관계를 밝힌 것뿐이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일부 연구자들이 가정한 것과 반대 방향일 수도 있다. 결혼한 사람들이 이미 이혼했거나 원래 독신인 사람들보다 행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 필연적으로 행복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복이 결혼의 이유일 수도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이 결혼을 일으키고 유지하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지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하며, 삶의 만족도도 크다. 그런 사람들은 배우자로서 더욱 매력적이며, 결과적으로 결혼할 가능성이 더 많고, 이혼할 가능성은 더 적다. 우울하고 불만스러워하는 배우자보다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은가. 결혼한 사람들이 독신인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더 행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화학적으로 우울한 경향이 있는 여성은 남편과 함께 지낸다고 해서 반드시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생물학자는 광신자가 아니다. 행복이 '주로' 생화학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심리학적, 사회학적 요인의 영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적 온도조절 시스템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감정적 경계의 하한선과 상한선을 넘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결혼과 이혼은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 있느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행복지수 5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길거리에서 열광적으로 춤을 출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결혼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때때로 지수 7을 누릴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지수 3의 낙담을 피하게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곧 역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는 의미가 된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의 생화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세로토닌 분비를 유발하는 외부자극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세로토닌 수준을 바꾸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중세 프랑스의 농부와 현대 파리의 은행가를 비교해 보자. 농부는 돼지우리가 내려다보이는 진흙 오두막에서 난방도 없이 살았다. 하지만 은행가는 샹젤리제가 내려다보이는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서 각종 최신 장치를 완비해 놓은 채 살고 있다. 당신은 즉각 기업가가 중세 농부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흙 오두막이나 펜트하우스, 샹젤리제가 우리의 기분을 결정짓지 않는다. 세로토닌이 그렇게 한다. 중세의 농부가 자신의 진흙 오두막을 완성했을 때, 뇌의 뉴런은 세로토닌을 분비해 행복 수치를 10으로 올렸다. 2014년 이 기업가가 멋진 펜트하우스의 대금을 모두 치렀을 때, 그의 뇌에 있는 뉴런은 농부와 비슷한 양의 세로토닌을 분비해 역시 10으로 수치를 올렸다. 펜트하우스 최상층이 진흙 오두막보다 훨씬 더 안락하다는 사실은 뇌에 아무런 차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뇌가 오로지 아는 것은 현재 세로토닌 수치가 10이라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기업가는 자신의 태고조의 태고조 할아버지인 중세의 가난한 농부보다 조금도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원리는 개인의 삶에서만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적 사건에도 돌일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프랑스혁명을 보자. 혁명가들은 왕을 처형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인권선언을 하고,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유럽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프랑스인의 생화학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결과, 혁명이 초래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프랑스인의 행복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유전자 복권에서 '즐거운 생화학'에 당첨된 사람은 혁명 전이나 후나 여전히 행복했고, '우울한 생화학'을 가진 사람은 과거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라네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신랄한 불평을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에게 던졌다. 만일 그렇다면, 프랑스혁명에 무슨 좋은 점이 있었을까? 사람들이 조금도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면, 그 모든 혼란과 공포, 피와 전쟁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생물학자들이라면 결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정치 혁명이나 사회 개혁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체의 생화학은 거듭해서 이들을 속인다.
실질적인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진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나 반란이나 이데올로기에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대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에, 즉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가 뇌의 생화학 시스템을 이해하고 적절한 요법을 개발하는데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다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아도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일레로 프로작(미국 일라이 릴리 제약사가 개발한 항우울제 - 옮긴이)은 생화학 시스템 자체는 바꾸지 않지만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게 돕는다. 과거 뉴에이지 세대의 유명한 구호만큼 생물학자들의 주장을 핵심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또 없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 성형수술, 아름다운 집, 높은 자리는 우리에게 전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지속적 행복은 오로지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에서만 온다.
미국 대공황의 절정기인 1932년 출간된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 속에서,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며 향정신성 약물이 경찰과 투표 대신 정치의 기반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사람은 날마다 '소마'라는 약을 복용하는데, 생산성과 효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합성 마약이다.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 정부는 전쟁이나 혁명, 파업이나 시위로 인해 위협받는 일이 전혀 없다. 모든 사람이 현재의 상황에 어떻든 대단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헉슬리의 미래상은 조지 오웰의 <1984> 보다 훨씬 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헉슬리가 그려내는 세상을 괴물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왜 그런지 설명하기는 힘들다. 모든 사람이 항상 행복하다는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헉슬리가 그려낸 당황스러운 세계는 행복과 쾌감이 동일하다는 생물학적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쾌락적인 신체적 감각을 느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은 이 감각의 크기와 지속기간을 제한한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행복을 일정 기간 이상 느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행복에 대한 이런 정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에게 하루의 일상적인 활동을 재평가하라고 요구해 보았다. 상황을 하나하나 떠올려 가며, 그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혹은 싫었는지를 평가하게 했다. 카너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갖는 시각에서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예로 들면, 즐거운 순간과 지겨운 순간을 평가하게 한 결과 양육은 상대적으로 불쾌한 일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짜증을 달래는 일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무엇이 정말 자신에게 좋은지를 모른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삶을 분 단위로 평가할 때, 중세 사람들의 삶은 고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이 죽음 뒤에 영원한 행복이 온다는 약속을 신봉했다면, 자신의 삶을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대의 불신자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완전하고도 가치 없는 망각 외에는 기대할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 전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이들은 주관적 행복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세 조상들이 행복했던 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집단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환상에 구멍을 뚫어 파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내세의 의미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의미보다 더 심한 망상이 아니었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은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므로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어떤 병사는 자신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므로 삶에 의미가 있다고 하고, 어느 기업가는 해로 회사를 세우는 데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들이 찾는 의미가 중세 사람들이 경전을 읽거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고 새로운 성당을 짓는 데서 찾았던 의미보다 더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만일 행복이 쾌락적 감각을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의 생화학 시스템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만일 행복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좀 더 효과적으로 기만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앞의 두 견해는 행복이란 모종의 주관적 느낌(쾌감이든 의미든)이라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복을 판단하려면 그들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는 가정도 깔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논리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우리 세대의 지배적 종교가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주관적 기분을 신성시한다. 개인의 기분과 느낌이 권위의 최고 원천이라고 본다. 선과 악, 미와 추, 당위와 존재는 우리 각자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자유주의 정치학은 투표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알려주는 빅브라더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있는 것이라고 인문학은 선언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라고 교육받는다. 광고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저질러버려!" 액션 영화, 연극, 연속극, 소설, 인기 팝송은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한다. "자신에게 충실해라."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라." "내면의 소리를 따르라." 장 자크 루소는 이런 견해를 가장 고전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선이고, 내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악이다." 유년시절부터 이런 구호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은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가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자유주의에 특유한 것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대부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선함과 아름다움, 당위에는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의 느낌이나 선호는 신뢰하지 않았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글귀는 "너 자신을 알라!"인데,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보통 사람은 진정한 자신에 대해 모르며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물었다면, 아마도 여기에 동의했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도 마찬가지로 대답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이 기도보다는 성관계를 더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성 바오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관계가 행복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바오르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것이 증명하는 바는 인간이 본래 죄 많은 존재이며 쉽게 사탄의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뿐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로인 중독자와 어느 정도 비슷한 상태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마약 사용자들의 행복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자. 중독자들의 여론을 조사한 결과, 하나같이 마약을 하고 있을 때만 행복하다는 답이 나왔다고 하자, 이 심리학자는 헤로인이 행복의 핵심이라고 단언하는 논문을 출간할 것인가?
주관적 느낌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주관적 느낌의 가치에 대해서라면, 찰스 다윈이나 리처드 도킨스도 성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의 복제에 좋은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설사 그 선택이 개체로서의 자신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평화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대신에 노동하고 걱정하고 경쟁하고 싸우며 삶을 보내는데, 이들의 DNA가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따라 그렇게 조종하기 때문이다. 악마와 마찬가지로, DNA는 덧없는 기쁨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는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도들은 지난 2,500년에 걸쳐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불교 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성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정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즈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거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즈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