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10

제1부 인지혁명/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82쪽~90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꼭! 2025.01.10.




제1부 인지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2. 지식의 나무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4. 대홍수


[필사와 단상]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인간의 본성과 역사의 심리를 이해하려면 수렵채집인 조상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 종은 존속 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수렵채집으로 살았다. 물론 지난 2백 년간 도시 노동자자 사무직 직원으로서 일용할 양식을 얻은 사피엔스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이에 앞선 1만 년 동안 대부분의 사피엔스는 농부와 목축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 기간은 우리 조상들이 수렵과 채취를 한 수만 년에 비하면 눈 깜짝할 새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번성하는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현대인의 사회적-심리적 특성 중 많은 부분이 이처럼 농경을 시작하기 전의 기나긴 시대에 형성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의 뇌와 마음은 수렵채집 생활에 적응해 있다고 이 분야 학자들은 주장한다. 식습관, 분쟁, 성적 특질 모두, 우리의 수렵채집 마인드가 후기 산업사회의 환경과 거대 도시, 여객기, 전화, 컴퓨터와 상호작용한 결과다. 이런 환경 덕분에 우리는 이전의 어떤 세대와 비교하더라고 물적 자원이 풍부해지고 수명도 길어졌지만, 이 환경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소외되고 우울하고 압박받는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알려면 우리를 형성했던 수렵채집 세계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는 아직도 그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리는 왜 몸에 좋을 것 없는 고칼로리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일까? 오늘날의 풍요사회는 비만이라는 악성 전염병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이 병은 개발도상국으로도 빠르게 번져나가는 중이다. 어째서 우리가 가장 달콤하고 기름기 많은 음식을 이렇게 탐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우리의 수렵채집인 조상이 지녔던 식습관을 알기 전에는 혼란스럽게만 느껴진다. 조상들이 살던 초원과 숲에는 칼로리가 높은 달콤한 음식이 매우 드물었다. 전반적으로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3만 년 전 전형적인 수렵채집인 손에 넣을 수 있는 달콤한 식품은 오직 하나, 잘 익은 과일뿐이었다. 무화과가 잔뜩 열린 나무를 발견한 석기시대 여성을 떠올려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행동은 그 자리에서 최대한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 지역에 사는 개코원숭이 무리가 모두 따 먹기 전에 말이다. 고칼로리 식품을 탐하는 본능은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고층아파트에 살며 냉장고에 먹을 것이 가득하지만, 우리의 DNA는 여전히 아프리카 초원 위를 누빈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통을 발견하면 한 숟가락 푸욱 떠서 먹고 점보 콜라로 입가심까지 하는 것이다.

'게걸스러운 유전자'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이론들은 이보다 훨씬 더 논쟁적이다. 예컨대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고대의 수렵채질인 무리는 일부일처제 부부를 중심으로 한 핵가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공동체는 사유재산이나 일부일처 관계, 심지어 아버지라는 개념도 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무리의 여성은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그리고 여자)와 성관계를 하고 밀접한 유대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무리의 성인들은 모두 힘을 합쳐 아이들을 키웠을 것이다. 누가 자신의 친자식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모든 아이에게 공평하게 관심을 나타냈다.

이런 사회 구조는 몽상적 유토피아만은 아니다. 기록을 보면 동물들, 그중에서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와 보도모 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남미의 원주민 바리족처럼 집단적 부권이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적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기가 생기는 것은 여성의 자궁에 한 남자의 정자가 아니라 여러 남자의 정자가 축적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좋은 엄마라면 반드시 여러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도록 애를 쓰게 마련이고, 임신 중에는 특히 더하다. 자신의 아기가 최고의 사냥꾼 아니라 최고의 이야기꾼, 최강의 전사 그리고 가장 사려 깊은 연인의 자질(그리고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이야기가 한심하게 들린다면, 현대 발생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한 명의 남자에 의해 아기가 생기는지, 많은 남자에 의해 생기는지를 판별할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오늘날 결혼생활을 특징짓는 잦은 불륜, 높은 이혼율, 나아가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겪는 갖가지 심리적 콤플렉스들은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을까. '고대 공동체' 이론의 지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생물학적 소프트웨어와 맞지 않는 핵가족과 일부일처제로 살도록 강제한 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가 이 이론을 강하게 거부하며, 일부일처제와 핵가족의 형성은 인간 행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고대의 수렵채집 사회가 현대사회보다 종 더 공유 공동체적이고 평등한 경향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들 사회는 수많은 개별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각 단위는 질투심 강한 커플과 그들이 함께 키우는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문화에서 일부일처 관계와 핵가족이 표준인 것은 이 때문이고, 남녀가 자기 파트너에 대해 강한 소유욕을 느끼며 자신의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여, 현대국가인 북한과 시리아에서 정치권력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해지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이런 논쟁을 해결하고 우리의 성적 특징, 사회, 정치를 이해하려면, 조상들의 생활여건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7만 년 전 인지혁명과 12,000년 전 농업혁명 사이에 사피엔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이다.


불운하게도 우리에게는 수렵채집인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거의 없다. '고대 공유 공동체'와 '영원한 일부일처제' 학파 간의 논쟁은 빈약한 증거를 토대로 한다. 수렵채집 시절의 문자 기록은 당연히 없거니와 고고학적 증거라고 해봐야 주로 화석화된 뼈와 석기 따위다. 나무나 대나무, 가죽처럼 좀 더 썩기 쉬운 재료로 만든 인공물은 특정한 조건하에서만 살아남았다. 우리가 농경시대 이전의 사람들이 석기시대에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고고학적 편향 탓에 생긴 오해다. 석기시대는 목기시대로 부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쓰던 도구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공물로 고대 수렵채집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에는 문제가 많다. 고대인들과 그 후손인 농경시대, 산업화시대 사람들 사이의 확연한 차이 중 하나는 고대 수렵채집인들에게는 인공물이 극히 드물었고, 인공물이 고대 수렵채집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대단치 않았다는 점이다. 풍요로운 현대사회의 전형적인 구성원은 평생 살면서 수백만 개의 인공물을 갖게 된다. 자동차, 집, 일회용 기저귀, 종이로 된 우유팩...... 우리의 활동, 신념, 심지어 감정은 거의 모두 우리가 직접 만든 물건들의 영향을 받는다. 가령 우리의 식습관은 숟가락과 잔에서 유전공학 연구실과 거대한 대양선까지, 넋이 나갈 만큼 다양한 물건들의 영향을 받는다. 놀이를 할 때는 플라스틱 카드에서 10만 석짜리 경기장까지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장난감을 이용한다. 낭만적이고 성적인 관계에는 반지, 침대, 좋은 옷, 섹시한 속옷, 콘돔, 고급 레스토랑, 싸구려 모텔, 공항 라운지, 결혼식장, 출장 외식업체 등이 따른다. 종교는 고딕 성당, 무슬림의 모스크, 힌두교의 아시람(수행하며 거주하는 곳 - 옮긴이), 토라 두루마리, 티베트의 전경기(기도, 명상할 때 들리는 바퀴 모양의 경전 - 옮긴이), 성직자들의 검은색 옷, 양초, 향료, 크리스마스트리, 유대인의 경단, 묘비, 황금 성상聖像 등을 통해서 우리 삶에 신성함을 안긴다.

우리는 이사 갈 때가 되어야 비로소 여기저기 우리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 수렵채집인들은 매달 매주, 심지어 매일 집을 옮겼다. 가진 것을 모두 등에 짊어지고 말이다. 이삿짐센터도 짐마차도 짐을 운반할 가축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신적 종교적 감정적 삶의 태반은 인공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뤄졌다고 가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지금부터 10만 년 후의 고고학자는 모스크의 잔해에서 발굴한 수많은 물건을 토대로 무슬림의 신앙과 관습을 나타내는 타당한 그림을 끼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대 수렵채집인의 신앙과 의식을 이해하려면 난처하기만 하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학자가 21세기 미국 십 대의 사회적 행태를 재래식 우편물만 가지고 그려야 할 때 처할 딜레마와 거의 비슷하다. 그때는 전화 통화 내용, 이메일, 블로그, 텍스트 메시지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공물에 의존하면 고대 수렵채집인의 삶을 왜곡하게 된다. 이 문제를 시정하는 방법 중 하나는 현대의 수렵채집 사회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들 사회는 인류학적 방법으로 직접 연구가 가능하다. 하지만 현대 수렵채집 사회로 고대 수렵채집 사회를 추론할 때는 반드시 주의힐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현대까지 살아남은 모든 수렵채집 사회는 이웃한 농경 및 산업사회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 수십만 년 전에도 그러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둘째, 오늘날 수렵채집 사회가 살아남은 지역은 주로 기후가 거칠고 땅이 황량하며 농사에 적당치 않은 곳이다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극단적 환경에 적응한 사회를 보고 양쯔강 유역처럼 비옥한 지역에 자리 잡았던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될 여지가 매우 크다. 특히 칼라하리 사막 같은 곳의 인구밀도는 양쯔강 유역보다 훨씬 더 낮다. 이것은 인간 무리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무리들 간의 관계에 대한 핵심질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수렵채집 사회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들 사회가 서로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지역별로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요, 같은 지역 내에서도 차이가 크다. 호주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 목격했던 원주민 사회의 엄청난 다양성이 좋은 예다. 영국인이 정복하기 직전, 이 대륙에는 2백~6백 개 부족한 속한 30만~70만 명이 살았는데 각 부족은 또한 여러 개의 세부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개별부족은 고유한 언어, 종교, 규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호주 남부의 에들레이드에 해당하는 지역 주변에 살던 여러 일족들은 자신들이 부계로 계승된다고 여겼다. 이들 일족은 엄격히 영토마을을 근거로 찾아서 더 큰 부족으로 뭉쳤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주 북부에 살던 일부 부족은 모계 쪽의 계보를 더욱 중시했고, 한 사람이 어는 부족에 속하는지는 영토가 아니라 토템에 의해 결정되었다.

고대 수렵채집인들 사이의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도 이와 마찬가지로 상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농업혁명 전에 지구에 살고 있던 5백만~8백만 명의 수렵채집인은 수천 개의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수천 개의 개별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이것은 인지혁명의 주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픽션이 등장한 덕분에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동일한 생태적 조건하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매우 다른 상상의 실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서로 다른 상상의 실체들은 서로 다른 규범과 가치로 모습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옥스퍼드 대학교가 있는 지역에 3만 년 전 살고 있던 수렵채집인 무리는 케임브리지에 살고 있던 무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충분하다. 한 무리는 호전적이고 다른 무리는 평화적이었을 수도 있다. 케임브리지에 살던 무리는 공유 공동체적이고 옥스퍼드에 살던 무리는 핵가족을 기반으로 했을지 모른다. 케임브리지에 살던 무리는 자기네 수홍정령의 모습을 담은 묵상을 제작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을지 모른다. 이에 비해 옥스퍼드에 살던 무리는 춤을 통해 예배를 드렸을 수도 있다. 전자는 환생을 믿는 반면, 후자는 이것을 난센스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 집단에선 동성애가 용인되는 반면, 다른 집단에서는 금기였을 수도 있다.

요컨대, 현대 수렵채집인에 대한 인류학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 수렵채집인들에게 어떤 가능성들이 있었을지 이해할 수 있지만, 고대엔 그 가능성의 지평이 훨씬 더 넓었고, 그 대부분은 우리 시야에서 가려져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은 주된 쟁점을 놓치고 있다, 인지혁명 이래 사피엔스에게는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를 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을 문화적으로 선택하느냐라는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뇌와 마음은 수렵채집 생활에 적응해 있다.'

'자연인' TV 프로그램을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즐겨보는 이유인가 싶다.

살면서 수백만 개의 인공물을 갖는다는 현대인,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자연물은 거의 없다.

숨마저도 자연을 찾아 나서야 맑은 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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