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농업혁명/ 8. 역사에 정의는 없다(230~236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132
6. 피라미드 건설하기 160
7. 메모리 과부하 190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208
[필사와 단상]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능은 애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남성male과 여성female으로 나뉜다. 호모 사피엔스 남성은 X염색체와 Y염색체를 가진 존재이고, 여성은 X염색체 두 개를 가진 존재이다. 하지만 '남자man'와 '여자woman'는 생물학적 범주가 아니라 사회적 범주를 지정한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사회에서 대다수의 경우에는 남자는 남성이고 여자는 여성이지만, 남자와 여자라는 사회적 용어는 많은 것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생물학적 용어와는 관련이 희박하다.
남자는 단지 XY염색체와 고환 같은 특정한 생물학적 속성을 지닌 사피엔스를 일컫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속한 사회가 상상하는 인간의 질서 상에서 특정한 자리에 딱 맞는 존재를 일컫는다. 그가 속한 문화의 신화들은 그에게 특정한 자리에 딱 맞는 존재를 일컫는다. 그가 속한 문화의 신화들은 그에게 특정한 사내다운 역할(예컨대 정치 참여), 권리(예컨대 투표권), 의무(예컨대 군복무)를 부과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란 두 개의 X염색체와 하나의 자궁, 많은 에스트로겐 호르몬을 지닌 사피엔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상의 인간 질서에 속하는 여성 구성원을 말한다. 그녀가 속한 사회의 신화들은 그녀에게 독특한 여성다운 역할(아기를 키운다), 권리(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의무(남편에게 복종)를 부과한다.
생물학이 아니라 신화가 남녀의 역할, 권리, 의무를 규정하기 때문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의미는 사회에 따라 크게 달랐다. 혼동을 줄이기 위해 학자들은 보통 생물학적 범주인 성性과 문화적 범주인 젠더를 구분한다. 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고, 이 구분의 속성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지속되어 왔다. 젠더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고(일부 문화에서는 다른 범주로 구분한다). 소위 '남자다운' 속성과 '여자다운' 속성의 내용은 상호 주관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가령 현대 아테네와 고대 아테네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속성은 행동과 욕망, 의상, 심지어 자세까지 큰 차이가 있다.
성은 애들 장난이지만, 젠더는 심각한 비즈니스다. 남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일 중 하나다. X, Y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나기만 하면 된다. 여성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쉽다. X염색체 한 쌍이면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자나 여자가 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요구사항이 많은 프로젝트다. 남성적 특질이나 여성적 특질은 대부분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도 남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남자로 쳐주지 않고 여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여자로 쳐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런 자격은 한 번 얻었다고 해서 계속 안주할 수 있는 월계관도 아니다.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 끊임없는 의례와 퍼포먼스를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여성의 일도 끝나는 법이 없다. 여성은 평생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자신이 충분히 여성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야 한다.
그게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특히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잃을까 봐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역사를 통틀어 남성들은 오로지 남들에게서 "그는 진짜 남자야"란 말을 듣기 위해서 기꺼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거나 심지어 목숨을 바쳐왔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부터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부계사회였다. 한 사회가 남자와 여자를 무어라고 규정하든, 남자가 되는 편이 언제나 더 나았다. 부계사회는 남자에게 남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여자에게는 여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친다. 감히 남녀를 구분 짓는 경계를 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처벌하지만,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에게 동등하게 보상하지는 않는다. 남성적이라고 평가받는 속성들은 여성적이라고 평가받는 속성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여자다움의 이상을 구현한 구성원은 남자다움의 이상을 구현한 구성원에 비해 얻는 것이 더 적다. 여성의 건강에 투자되는 자원은 더 적고, 여성은 경제적 기회도 정치권력도 이동의 자유도 더 적게 지닌다. 젠더는 이상한 경주와 같아서, 어떤 주자들은 아무리 경쟁해 봐야 겨우 동메달만 딸 수 있다.
물론 알파의 지위까지 올라간 여성이 한 줌 있기는 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중국의 측천무후(기원후 700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하지만 이들은 규칙의 존재를 증명하는 예외에 해당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였던 45년 내내 모든 의원들은 남자였고, 육군과 해군의 모든 장교는 남자였고, 모든 판사와 변호사, 주교와 대주교, 신학자와 사제는 남자였으며, 모든 의사와 외과의사, 모든 대학과 칼리지의 학생과 교수도 남자였고, 모든 시장과 주 장관, 거의 모든 작가, 건축가, 시인, 철학자, 화가, 음악가, 과학자도 남자였다.
가부장제는 거의 모든 농경 및 산업 사회에서 표준이었다. 가부장제는 정치적 격변에도, 사회적 혁명, 경제적 대변화에도 끈기 있게 버텨냈다. 예컨대 이집트는 수십 세기에 걸쳐 수없이 많이 정복당하여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아랍, 맘루크, 터키, 영국에게 점령당했지만, 이집트 사회는 늘 가부장제를 유지했다. 이집트는 파라오의 법, 그리스 법, 로마 법, 무슬림 법, 오토만 제국법, 영국 법의 통치를 받았지만, 이 모든 법은 '진정한 남자'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을 차별했다.
가부장제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우연한 사건에 의해 촉발된 모종의 악순환의 결과일 수가 없다. 심지어 1492년 콜럼버스의 미 대륙 상륙 이전에도 미 대륙과 아프로아시아의 대부분이 가부장제 사회였다. 이천 수천 년간 두 대륙이 전혀 접촉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만일 아프로아시아의 가부장제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면, 아즈텍과 잉카는 왜 가부장제란 말인가? '남자'와 '여자'의 정확한 정의가 문화마다 다를지라도, 거의 모든 문화가 여성성보다 남성성을 가치 있게 여기는 데는 모종의 보편적인 생물학적 이유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수많은 이론이 있지만, 설득력이 있는 것은 없다.
생물학이 아니라 신화가 남녀의 역할, 권리, 의무를 규정하기 때문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의미는 사회에 따라 크게 달랐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부터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부계사회였다.
'다움' '답다'.
여자다움, 남자다움, 여자답다, 남자답다, 사내는 우는 게 아니야, 사내가 계집애처럼 울기는,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돼, 베이비부머세대까지만 해도 자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는 유전적 생리적 특성이 기반이 된 생물학적 性의 역할이라기보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형성시켜 기대하는 性의 역할인 것이다. 이 역할의 기대는 결국 가부장적 사회를 조성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호주제'를 성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