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인류의 통합/ 11. 제국의 비전(291~302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필사와 단상]
11. 제국의 비전
우리에게 분명한 정보가 남아 있는 최초의 제국은 사르곤 대제(기원전 2250년경)의 아카드 제국이다.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작은 도시국가인 키쉬의 왕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몇십 년 지나지 않아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도시국가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중심 지역 바깥에 있는 넓은 영역까지 정복했다. 사르곤은 자신이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뽐냈다. 실상 그의 통치권은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미쳤으며 오늘날의 이라크와 시리아 대부분, 현대 이란과 터키의 일부를 포함했다.
아카드 제국은 창건자가 죽은 뒤 오래가지 못했지만, 사르곤이 남긴 제국을 물려받아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거의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로부터 1,700년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히타이트의 왕은 사르곤을 역할모델로 삼았고 자신 역시 전 세계를 정복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0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등장해 이보다 더욱 인상적인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전까지 아시리아의 왕은 언제나 아시리아의 왕으로 남아 있었다.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아시리아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명백했으며 그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런데 키루스는 전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우리가 너희를 정복하는 것은 너희를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키루스는 복속당한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랐으며, 페르시아의 신민이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를 원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자기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한 민족의 찬양을 받기 위해서 기울인 창의적 노력이다. 바빌로니아에 유배되어 살고 있던 유대 민족에게 고대 유대의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사원을 다시 세우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들에게 자금가지 지원했다. 카루스는 스스로를 유대인을 지배하는 페르시아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또한 유대인의 황이었으며, 다라서 그들의 복지에 책임이 있었다.
온 세상을 그들을 위해 지배한다는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주제넘은 것이었다. 진화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사회적 포유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이민족 공포증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사피엔스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두 부류로 나눈다. 우리란 너와 나, 언어와 종교와 관습이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그들과 전혀 다르며, 그들에게 빚진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우리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수단의 딩카족(수단의 유목 부족) 언어에서 '딩카'는 그냥 '사람들'이란 뜻이다. 딩카가 아닌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딩카의 숙적은 누에르족이다. 누에르족 언어에서 누에르는 무슨 뜻일가? '원래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수단 사막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알래스카의 동토와 시베리아 북동부에는 유픽족이 살고 있다. 유픽어로 '유픽'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진정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런 인종적 배타성과 대조적으로, 카루스 이래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는 일이 흔히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제국은 온 세상이 기본적으로 하나라는 것. 모든 장소와 시대에 적용되는 일군의 원칙들이 있다는 것,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었다. 인류는 하나의 대가족으로 인식되었고, 부모의 특권은 자녀의 복지에 대한 책임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었다.
키루스와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제국관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로, 그에게서 다시 고대 그리스의 왕, 로마의 황제, 무슬림 칼리프, 인도의 세습군주, 그리고 마침내 심지어 소련의 지도자와 미국 대통령에게로 이어졌다. 이처럼 자애로운 제국관은 제국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피지배 민족들의 반란 시도를 무효화했으며 독립된 민족들이 제국의 팽창에 대항하려는 시도까지 무효화했다.
페르시아 모델과는 독립적으로, 그것과 비슷한 제국관이 세계 곳곳에서 개발되었다. 중앙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영역,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전통적 정치이론에 따르면, 하늘은 지상에 있는 모든 정통성 있는 권력의 원천이다. 하늘은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나 가문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천명天命을 내린다. 해당 인물이나 가문은 그 아래 모든 백성을 위해 천하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정통성을 지닌 권력은 정의상 보편적 권력이다. 지배자에게 천명이 없으면 그는 하나의 도시를 다스릴 정당성조차 없지만, 지도자가 천명을 받으면 그는 온 세상에 정의와 조화를 퍼뜨릴 의무를 지게 된다. 천명은 여러 후보에게 동시에 주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둘 이상의 독립국가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은 이렇게 자랑했다. "우주의 여섯 방위를 통틀어 만물이 황제에게 속한다.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황제의) 신민이 되지 않은 이가 없다...... 짐의 덕은 심지어 말과 소에게까지 미친다. 짐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은 짐의 지붕 아래에서 안전을 누린다." 그러므로 중국의 정치사상에서나 역사기록에서나 황제의 시기는 질서와 정의를 갖춘 황금시대로 평가된다. 현대의 서구적 시각에서 공정한 세계는 서로 독립된 국민국가들로 구성되어야 하지만, 중국에서 정치적 분열의 시대는 혼란과 불공정으로 얼룩진 암흑시대로 비쳤다. 이런 인식은 중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하나의 제국이 통과하면, 지배적인 정치이론은 언제나 권력자들에게 하찮은 독립군주에 안주하지 말고 중국의 재통일을 시도해야 한다고 들들 볶았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이르든 늦든 늘 성공했다.
제국은 수많은 작은 문화를 융합해 몇 개의 큰 문화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제국 내에서는 아이디어와 사람, 재화와 기술이 정치적으로 분열된 지역에서보다 더욱 쉽게 퍼져나갔다. 제국 자체가 의도적으로 아이디어와 제도, 관습과 규범을 퍼트린 일도 빈번했다. 하나의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편하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제국 내에 있는 작은 관할 구역들이 저마다 별개의 법과 서식과 언어와 화폐를 지니고 있으면 지배하기가 힘들다. 표준화는 황제에게 대단히 유용했다.
제국이 공통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전파한 이유로 첫 번째 못지않게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정통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최소한 키루스와 신시황의 시대 이래 제국은 스스로의 행동이 -도로 건설이 되었든 유혈사태가 되었든 - 우월한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정당화했다. 자기네 문화는 정복자보다 피정복자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가끔은 그 이득이 현저했다. 법의 집행, 도시 계획, 도량형의 표준화가 그랬다. 그러나 가끔은 의문스러웠다. 세금, 징집, 황제 숭배가 그랬다. 하지만 제국의 엘리트 대부분은 자신이 제국 모든 주민의 일반적 복지를 위해 일한다고 진지하게 믿었다. 중국의 지배층은 이웃 나라와 그 신민들을 제국이 문화의 혜택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비참한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황제에게 천명이 부여된 것은 세상을 착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가르치라는 의도에서였다.
로마인들도 유사한 주장을 폈다. 자신들이 야만인들에게 평화와 정의와 교양을 전해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개한 게르만족과 얼굴에 물감을 칠한 갈리아족은 천하고 무지하게 살다가 로마인 덕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로마인들이 그들을 법으로 길들이고 공공 욕장에서 깨끗이 씻게 하고 철학을 통해 나아지게 해 주었다고 했다.
기원전 3세기의 마우리아 제국은 몽매한 세계에 부처의 가르침을 퍼뜨리는 것을 사명으로 살았다. 무슬림 칼리프들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시를 퍼뜨리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 가능하면 평화롭게, 필요하면 무력을 써서라도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은 자신들이 인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부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을 진정한 신앙으로 개종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이라는 쌍둥이 복음을 퍼뜨리겠다는 영국의 사명에는 해가 지는 일이 없었다. 소련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유토피아적 독재로 향하는 불굴의 역사적 행진을 촉진해야 한다는 의무에 스스로 매여 있었다.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부에게는 제3세계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혜택을 가져다줄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좋은 것들을 순항 미사일과 F16 전토귀로 배달해야 하더라도.
제국이 퍼뜨리는 문화적 아이디어를 지배 엘리트가 독자적으로 창조한 경우는 많지 않다. 제국관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국의 엘리트들은 하나의 편협한 전통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대신 어디서 발견한 것이든 좋은 아이디어, 규범, 전통을 쉽게 채택할 수 있었다. 일부 황제가 자신들의 문화를 정화하고 스스로 뿌리라고 생각한 것으로 되돌아가려고 한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제국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민족에게서 많은 것을 흡수하여 혼성 문명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문화는 로마적인 만큼이나 그리스적이었다. 제국주의 아바스 왕조(750~1258의 칼리프- 옮긴이)의 문화에는 페르시아,ㄱ리스, 아랍 문화가 모두 섞여 있었다. 제국주의 몽골 문화는 중국의 모방이었다. 제국주의 미국에서 케냐 혈동의 대통령은 좋아하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맨스>를 보면서 이탈리아 피자를 먹을 수 있다, 터키에 대항하는 아랍인의 반란에 관한 영국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면서 말이다.
이런 문화의 용광로가 패자의 문화적 동화 과정을 쉽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 문명이 다양한 피정복민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것을 흡수할지언정, 그런 혼성의 결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설었다. 동화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큰 정신적 충격을 운반하는 일이 많았다.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고 채택하는 것이 힘들고 스트레스인 것처럼, 자신이 사랑하고 친숙한 지역 전통을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피지배 민족이 제국의 문화를 수용한다 해도 심각한 문제가 남는다. 제국의 엘리트가 이들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수백 년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은 걸린다는 점이다 정복과 수용 사이에 끼인 세대는 소외되고 배제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사랑했던 지역문화를 이미 잃었지만, 제국주의 세계에 동등하게 참여할 자격은 받지 못했다. 그들이 수용한 문화는 그들을 여전히 야만인으로 보았다.
누만시아 함락 1세기 후의 혈통 좋은 이베리아인을 상상해 보자. 그는 부모아 같은 켈트어 방언을 사용한다, 하지만 라틴어도 배워서, 악센트가 약간 이상한 것 외에는 흠잡을 데 없이 구사할 수 있다. 사업을 하고 당국을 상대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정교하게 장식된 싸구려 장신구를 좋아하고 그는 그런 기호를 허용하지만, 아내가 이 지방의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켈트족 취향을 고수하는 게 약간 마음이 불편하다. 로마 총독의 아내가 달고 있는 장신구처럼 깔끔하고 단순한 취향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는 로마식 튜닉을 입는다. 그리고 복잡한 로마 상법에 정통한 것에 적잖이 힘입어 가축 상인으로 성공한 덕분에, 로마풍 빌라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베르길리우스의 <게오르기카> 제3권을 암송할 수 있는데도 로마인들은 그를 여전히 반쯤 야만인으로 취급한다. 그는 자신이 결코 관직을 얻거나 원형극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감을 느낀다.
19세기말 교육 수준이 높은 인도인들도 주인인 영국인들에게 똑같은 교훈을 배웠다. 야심 많은 어느 인도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복잡한 영국어에 통달했고, 서구식 춤을 배웠으며,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하는 데까지 익숙해졌다. 새로 익힌 몸가짐을 갖춘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유니버시키 칼리지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법정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하지만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이 법조인은 영국령 남아프리카의 기차에서 끌어내려졌다. 자신과 같은 유색인종이 타는 삼등칸이 아니라 일등칸에 타겠다고 고집한 대가였다. 그의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였다.
몇몇 경우에는 문화적 동화와 동질화 과정에서 신참과 옛 엘리트 사이의 벽이 마침내 무너지기도 한다. 피정복민은 제국을 더 이상 낯선 점령 시스템으로 보지 않고, 정복자도 그들의 신민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게 된다. 통치자와 피통치자 공히 '그들'을 '우리'로 보게 된 것이다. 로마의 모든 백성은 몇 세기에 걸친 제국의 통치 후에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로마 출신이 아닌 사람도 로마 군단 장교단의 최상위 계급으로 승진해서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기원후 48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골족의 저명인사 여러 명을 원로원에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관습과 문화와 결혼에 의해 우리와 섞였다"라고 연설했다. 속물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과거의 적들을 로마 정치체제의 심장부에 받아들이는 데 항의했으나, 쿨라우디우스는 그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상원의원 대부분이 한때 로마와 싸웠던 이탈리아 부족 출신으로 나중에 로마 시민권을 얻은 가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황제는 자신의 가문도 사비니(고대 이탈리아 중부에 있었다- 옮긴이)계라고 일깨워주었다,.
기원후 2세기 로마는 이베리아 출신의 황제들이 연이어 통치했는데, 이들의 혈관에는 아마도 최소한 몇 방울이나마 이베리아 지방 피가 흘렀을 것이다. 이베리아 출신 황제 - 트라야누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5현제로 불린다 - 옮긴이)-의 처세는 제국의 황금시대로 꼽힌다. 이후 인종적 댐은 모두 무녀저 내렸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황제는 리비아의 카르타고 가문 후손이었고, 알게발루스(218~222)는 시리아인이었다. 필리푸스 황제(244~249)는 세간에서는 '아랍인 필립'으로 불렸다. 제국의 새 시민들은 로마 문화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제국이 붕괴된 지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록 제국의 언어를 계속 사용했고, 제국의 법을 그대로 따랐으며, 제국의 레반트 지방에서 들려온 기독교의 신을 그대로 믿었다.
이와 유사한 과정이 아랍 제국에서도 일어났다. 기원후 7세기 중반에 처음 건설되었을 때 아랍 제국은 지배층인 아랍 무슬림과 그에 복속된 이집트인, 시리아인, 이란인,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아랍인도 무슬임도 아니었다. 제국의 많은 백성은 점차 무슬림 신앙과 아랍어, 제국의 혼성 문화를 받아들였다. 구시대적인 아랍 엘리트는 큰 적대감을 가지고 이런 벼락 출세자들을 멸시했다. 자신들의 고유한 신분과 독자성을 잃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낙심한 개종자들은 제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동등한 몫을 요구하며 떠들어댔고, 결국 이들은 원하던 것을 얻었다. 이집트인, 시리아인, 메소포타미아인은 점차 아랍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아랍의 제국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스스로 창조한 제국의 문화가 수많은 비아랍인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들은 그 문화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퍼뜨렸다. 심지어 원래의 제국이 무너지고 인종집단으로서 아랍인이 통치권을 잃어버린 다음에도.
중국에서 제국 프로젝트는 더욱 철저히 성공했다. 처음에는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엄청나게 많은 민족 및 문화 집단이 2천 년에 걸쳐 중구긔 제국 문화에 성공적으로 통합되어 한족(기원전 206년~기원후 220년에 중국을 통치한 한 나라의 이름을 땄다)이 되었다. 중국 제국의 궁극적 업적은 그것이 아직도 원기황성하게 살아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티베트나 신장 같은 외딴 지역에서 보지 않는 한, 이를 제국이라고 인식하기는 힘들다. 중국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스스로를 한족이라고 여기며 외부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지난 몇십 년간 진행된 식민지 해방과정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근대 유럽인들은 지구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우월한 서구 문화를 전파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 이들은 워낙 성공했기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그 문화의 상당 부분을 점차 받아들였다. 인도, 아프리카, 아랍, 중국, 마오리족 사람들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를 배웠다. 이들은 인권, 민족자결의 원칙을 신봉하기 시작했으며, 서방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페미니즘, 민족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20세기에 서구의 가치를 받아들인 지역의 집단들은 바로 이런 가치의 이름 아래 유럽 정복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수많은 반식민지 투쟁이 민족자결, 사회주의, 인권의 가치 아래 벌어졌다. 이런 가치들은 서구의 유산이다. 오늘날 인도, 아프리카, 중국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들을 지배했던 서구 군주의 제국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필요한 전통에 맞춰 변형시키려 노력해 왔다. 과거 이집트, 이란, 터키 사람들이 원래의 아랍 정복자들에게서 계승한 문화를 받아들여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대체로 제국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민족에게서
많은 것을 흡수하여 혼성 문명이 되었다."
"제국의 엘리트가 이들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수백 년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은 걸린다는 점이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이것이 지배자, 강자, 갑을 관계에서의 '갑' 등이 저지르는 가스라이팅이지 싶습니다. "우리만 행복하면 돼, 그들의 행복은 알 바 아니야." 말이 섬뜩하지 않나요?
이처럼 제국이 분류한 '우리'와 '그들', 이 무서운 것이 우리 역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