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49

제3부 인류의 통합/ 11. 제국의 비전(303~308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3부 인류의 통합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필사와 단상]

11. 제국의 비전


역사상의 선인과 악당

역사를 좋은 편과 나쁜 편으로 깔끔하게 나누고 모든 제국은 나쁜 편에 속한다고 분류하고픈 유혹이 들기는 한다. 어쨌든 거의 모든 제국은 유혈사태 위에 세워졌고 압제와 전쟁으로 권력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 대부분은 제국의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다. 제국이 정의상 나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세상에는 인간의 문화에서 제국주의를 제거하고 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소위 순수하고 진정한 문명만을 남기자는 취지의 학파와 정치운동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잘해봐야 순진할 따름이고, 나쁜 경우에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편견을 가리려는 포리부동한 눈속임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역사의 여명에 출현했던 무수히 많은 문화들 중 일부 문화는 순수하고 죄에 물들지 않았으며 다른 사회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명기 이후에는 어떤 문화도 그런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칠 수 없었으며, 오늘날 존재하는 문화 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모든 문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국과 제국주의 문명의 유산이며,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해도 환자를 죽이지 않고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독립한 인도 공화국과 영국령 인도 제국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관계를 생각해 보라. 영국은 인도를 정복하고 점령하는 과정에서 인도인 수백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식민 정부는 수억 명 이상의 인도인을 지속적으로 모욕하고 착취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많은 인도인은 개종의 기쁨을 누리면서, 민족자결이나 인권 같은 서구의 개념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이 스스로 천명한 가치에 부합하도록 인도인들에게 영국인과 동등한 권리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실망했다.

그럼에도 인도라는 현대 국가는 대영제국의 자식이다. 영국인들은 인도 아대륙의 거주자들을 살해하고 부상을 입히고 처형했지만 왕국과 공국과 부족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혼란스럽게 뒤섞였던 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공통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어느 정도 하나의 정치 단위로 기능하는 국가를 창조해 냈다. 영국인들은 인도 사법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행정부 구조를 창건했고, 경제적 통합에 극히 중요한 철도망을 건설했다. 독립 인도는 영국에서 구현된 형태의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로 받아들였다. 영어는 아직도 공용어를 쓰여, 힌디어, 타밀어, 말라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중립적 언어로서 쓰인다. 인도인들은 크리켓 경기를 매우 좋아하고 차를 열심히 마시는데, 둘 다 모두 영국의 유산이다. 상업적 차 재배는 19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존재하지 않다가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인도 전체에 차를 마시는 문화를 퍼뜨린 것은 젠체하는 영국인 사입(sahib, 과거 인도인이 신분 있는 유럽인을 불렀던 호칭- 옮긴이)들이었다.

오늘날 인도인 중에서 민주주의, 영어, 철도망, 사법제도, 크리켓, 차가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며 여기서 벗어나자고 국민투표를 요구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이 옛 지배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 아닐까?

설령 우리가 더 이전에 존재했던 진정한 문화를 재건하고 지키려는 희망에서 잔인한 제국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더라도, 보나 마나 그때 우리가 지키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덜 야만적인 제국의 유산에 불과할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인도 문화가 불구가 되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굴 제국의 유산과 그들의 델리 점령을 신성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외래 무슬림 제국의 영향에서 '진정한 인도 문화'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굽타 제국, 쿠샨 제국, 마우리아 제국의 유산을 신성시하는 셈이다. 만일 어떤 극단적 힌두 민족주의자가 있어서 뭄바이 기차역을 비롯해 영국 정복자가 남긴 모든 건물을 파괴한다면, 인도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남긴 타지마할 같은 구조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적 유산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첫걸음은 이 딜레마가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선인과 악당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보통 악당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새로운 지구제국

기원전 200년경 이래로 인간은 대부분 제국에 속해 살았다. 미래에도 대부분 하나의 제국 안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제국이 반드시 단일 국가나 단일 민족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후기 로마 제국이나 중국 제국처럼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문화에 따라 함께 모인 다민족 엘리트 집단에 의해 통치될 수도 있다.

세계는 21세기 초에도 여전히 200개가량의 독립 국가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떤 국가도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적이지 않다. 서로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엄청난 자본과 노동과 정보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단 하나의 글로벌 무역과 금융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의 경제위기나 미국에서 개발된 신기술은 지구 반대편 국가의 경제 상황에 즉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화적 트랜드도 마찬가지로 매우 빠르게 퍼진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인도 카레를 먹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영국식 축구를 하고, 최신 K팝 히트송을 들을 수 있다.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다민족 글로벌 세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기업가, 엔지니어, 은행원, 학자들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유사한 의견과 주제를 공유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200개가량의 국가들이 점차로 동일한 글로벌 문제를 공유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원자폭탄은 국경과 상관없어졌으며, 어떤 국가도 혼자만의 힘으로 핵전쟁을 완전히 예방하기란 불가능하다. 기후변화 역시 전 인류의 번영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어떠한 개별 정부도 지구온난화를 혼자 힘으로 막을 수 없다.

생명공학, 인공지능과 같은 신기술은 더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신기술은 무기나 차량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정신까지 개량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기술들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생명체를 만들거나 미래 진화의 과정에 개입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러한 신성한 창조 능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

글로벌 협력 없이 인류는 이러한 도전 과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어 보인다. 협력을 어떻게 해나갈지는 아직은 지켜봐야 한다. 폭력적인 충돌과 새로운 정복 제국의 강요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보다 평화로운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키루스 시대 이후 2,500년 동안 수많은 제국은 인류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보편적인 정치 질서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해 왔다. 그러나 전부 거짓말로 끝났고 실패했다. 진실로 보편적이었던 제국, 모든 인류에게 유익했던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의 제국은 잘 해낼 수 있을까?





"세계는 21세기 초에도 여전히 200개가량의 독립 국가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떤 국가도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적이지 않다.
서로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 문화 교류, 무역 교류, 심지어 코로나19 같은 전염성 바이러스조차도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를 위협했다. 국가의 일원인 시민 역시 제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물론 혼자 밥 먹고 혼자 여행하고 혼자 충분히 생활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생활이 가능하기까지 갖춰진 많은 것들이 순수 내게서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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