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50

제3부 인류의 통합/ 12. 종교의 법칙(309~320)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3부 인류의 통합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필사와 단상]

12. 종교의 법칙


중세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에 세워진 도시 사마르칸트의 시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리아 상인들은 섬세한 중국 비단 위에 손을 올리고, 대초원 지대의 난폭한 부족민들은 먼 서쪽에서 최근 잡아온 밀짚 빛 머리칼을 지닌 노예 무리를 전시했으며, 소매상인들은 생소한 왕의 옆얼굴과 문구가 새겨진 반짝이는 금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중세 동양과 서양, 남쪽과 북쪽의 주요 교차로인 이곳에서 인류의 통일은 일상적이었다.

1281년 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서 군대를 소집했을 때도 똑같은 과정이 작동함을 목격할 수 있었다. 모피를 두른 몽골 기병은 대나무 삿갓을 쓴 중국 보병들과 같이 어울렸으며, 술 취한 고려인 외인부대원들은 문신을 한 남중국해 출신 선원들과 싸움을 벌였고, 중앙아시아의 엔지니어들은 유럽 모험가들이 늘어놓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입을 딱 벌렸고, 이들 모두가 한 명의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한편 메카의 신성한 카바 신전 주변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인류의 통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메카의 순례자로서 기원후 1300년에 이슬람 최대의 성지 주변을 돌고 있었다면,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사람들과 한 무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옷은 바람에 펄럭이고, 눈은 황홀경에 불타는 듯하고, 입으로는 신의 99개 이름을 하나하나 되풀이해 읊조린다. 당신 바로 앞에는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온 터키인 족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있다. 햇빛으로 거칠어진 피부의 그는 절룩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있다. 왼편에 있는 칠흑 같은 피부에 금 장신구를 번쩍이는 무리는 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정향, 심황, 소두구 같은 향료와 바다 소금의 내음은 인도에서 온 형제들이 있다는 신호일 수 있고, 더욱 동쪽의 신비한 향신료 제도(몰루카 제도- 옮긴이)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 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게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러면 최소한 몇몇 근본적인 법만큼은 도전받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1. 종교는 고립된 관습이나 신념이 아니라 규범과 가치의 체계다. 행운을 얻겠다고 나무토막을 두드리는 건 종교가 아니다. 환생에 대한 믿음까지도 특정한 행동 기준을 세우지 못한다면 종교라고 할 수 없다.

2. 종교라고 인정되려면 해당 종교의 규범과 가치체계가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초인간적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프로 축구는 종교가 아니다. 수많은 규칙과 의식과 이따금 기묘한 의례가 있지만, 모두가 잘 알듯이 축구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은 언제라도 골문의 크기를 늘리거나 오프사이드 규칙을 폐기할 수 있다.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가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슬람교나 불교처럼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종교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그렇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 대부분의 고대 종교는 지역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신자들은 국지적 신과 영혼을 믿었으며, 인류 전체를 개종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양들을 침묵시키기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신념체계일 때, 인간의 규범과 가치는 동물, 식물, 요정, 유령 등 다양한 존재들의 관점과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갠지스강 유역의 수렵채집인 무리는 유달리 큰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베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정령이 노해서 복수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다. 인더스강 유역에 살았던 또 다른 수렵채집인 무리는 흰꼬리여우의 사냥을 금지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흰꼬리여우가 부족의 현명한 노파에게 귀중한 흑요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세계관이 매우 국지적이었고, 특정 장소나 기후현상이 지닌 독특한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의 수렴채집인은 면적 1천 제곱킬로미터도 안 되는 지역에서 평생을 보냈다.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계곡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먼 곳의 다른 계곡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규칙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더스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에 선교단을 보내 흰꼬리여우를 사냥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농업혁명은 종교혁명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인들이 채집한 식물과 사냥한 동물은 호모 사피엔스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호랑이가 인간을 사냥한다고 해서 인간이 호랑이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 없듯이, 인간이 양을 사냥한다고 해서 양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자신들이 더불어 사는 거주지를 다스리는 질서에 대해 협의했다. 농부들은 달랐다. 이들은 동식물을 소유하고 조작했다. 자신의 소유물들과 협의함으로써 스스로를 격하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문제를 낳았다. 농부들은 자신의 양 떼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었겠지만, 스스로의 통제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울타리에 양 떼를 가두고 숫양을 거세하고 암양을 선택적으로 교배시킬 수는 있었지만, 암양이 반드시 임신해서 건강한 새끼를 낳게 만들 수는 없었고 치명적 전염병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양 떼의 다산을 보호할 수 있을까?

신의 기원에 대한 지배적 이론은 신이 이 문제에 대답을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해졌다고 설명한다. 동식물이 말하는 능력을 잃자, 풍요의 여신, 하늘의 신, 의약의 신 같은 신들이 무대의 중앙에 등장했다. 이들의 주된 역할은 사람과 이제 벙어리가 된 동식물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었다. 고대 신화의 많은 부분은 실상 인간이 동식물을 지배하는 대가로 신들에게 영원히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법적인 계약이었다. 창세기의 첫 몇 장이 대표적 예다. 농업혁명 이래 수천 년간 종교의 예배는 주로 인간이 신에게 양과 포도주, 케이크를 바치고 그 대가로 풍성한 수확과 가축의 다산을 약속받는 것이었다.

농업혁명이 처음에 바위나 샘, 유령, 데몬 같은 애니미즘계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미친 충격은 이보다 훨씬 더 작았다. 하지만 이들도 점차 새로운 신들에 밀려 그 지위를 잃어갔다. 사람들이 평생 수백 제곱킬로미터의 좁은 지역에서 보내는 한, 지역의 정령만으로도 자신들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왕국과 교역망이 확대되자, 왕국 전체나 교역 지대 전체를 아우르는 권력과 권위를 지닌 존재들이 필요해졌다.

이런 수요에 부응하고자 하는 시도는 다신교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런 종교는 세상이 풍요의 여신, 비의 신, 전쟁의 신을 비롯한 한 무리의 강력한 신들에게 통제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인간은 신들에게 탄원할 수 있었고, 신들은 예배와 제물을 받는다면 황송하게도 비, 승리, 건강을 내려주실 수 있었다.

다신교의 출현과 함께 애니미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악마, 요정, 유령, 신성한 바위, 신성한 샘, 신성한 나무는 거의 모든 다신교를 이루는 핵심요소로 남아 있었다. 이들 정령의 중요성은 위대한 신들에 비해 크게 떨어졌지만, 수많은 보통 사람의 평범한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수도에 있는 왕이 위대한 전쟁의 신에게 수십 마리의 살찐 양을 제물로 바치며 야만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동안, 오두막에 있는 농부는 촛불을 켜고 무화과나무의 요정에게 병든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위대한 신들의 등장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양이나 악마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였다. 애니미즘은 인간을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한편 다신교는 세상이 신들과 인간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시각을 점점 더 키워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기도와 희생과 죄업과 선행이 생태계 전체의 운명을 결정했다. 멍청한 사피엔스 몇 명이 신들을 노하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홍수가 닥쳐와 수십억 마리의 개미와 메뚜기, 거북, 영양, 기린, 코끼리를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다신교는 신들의 지위뿐 아니라 인간의 지위도 격상시켰다. 옛 애니미즘 체계에 속하던 다른 불운한 존재들은 지위를 잃고,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위대한 드라마에서 엑스트라나 말없는 장식물로 전락했다.



우상숭배의 이점

서구인들은 2천 년 동안 일신교의 세뇌를 받은 탓에 다신교를 무시하고 유치한 우상숭배로 보게 되었다. 이것은 부당한 고정관념이다. 다신교의 내부 논리를 이해하려면 수많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탱하는 중심 사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다신교가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단일한 힘이나 법칙의 존재를 반박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다신교, 심지어 애니미즘 종교는 모든 다른 신들이나 악마, 신성한 바위의 배후에 있는 최고권력을 인정했다. 고전 그리스 다신교에서 제우스, 헤라, 아폴론과 그 동료들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전능한 힘, 즉 운명의 여신(모이라, 아낭케)에게 복종했다. 북유럽의 신들 역시 라그나뢰크의 격변(신들의 황혼)으로 사라질 운명에 얽매여 있었다. 서아프리카 요루바족의 다신교에서 모든 신은 최고신 올로두마레에게서 태어났으며 그의 신하로 남아 있다. 힌두 다신교에서는 아트만이라는 단 하나의 원리가 무수한 신들과 정령, 인간, 생물학적 세상과 물리적 세상 모두를 통제한다. 아트만은 전 우주의 영원한 정수이자 영혼이면서 모든 개인과 모든 현상의 정수이기도 한다.

일신교와 구별되는 다신교의 근본적 통찰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은 관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민간의 평범한 욕망이나 근심 걱정에 개의치 않는다. 이 권력에게 전쟁의 승리나 건강, 비를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위치에서 보면, 특정 왕국의 승리나 패배, 특정 도시의 번영이나 쇠퇴, 특정인의 회복이나 사망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명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힌두교도들도 아트만을 위한 사원을 짓지 않았다.

우주 최고 권력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이유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다 끌어안고 패배나 가난, 질병, 죽음까지도 끌어안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힌두교에서 성자나 고행자로 알려진 신자는 자신의 삶을 아트만과의 합일을 위해 바치며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이들은 그런 근본원리와 관점에서 세상을 보려고 애쓰며,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 평범한 모든 욕망과 두려움은 무의미하며 덧없는 현상임을 인식하려 애쓴다.

하지만 대부분의 힌두교 신자는 성자가 아니다. 이들은 세속의 관심사에 깊이 빠져 있으며, 아트만은 여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문제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힌두교도들은 부분적 권력을 가진 신들에게 접근한다. 가네샤, 락슈미, 사라스바티 같은 신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이 아니라 부분적 힘만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관심과 편견을 지니고 있다(가네샤는 지혜와 학문의 신, 락슈미는 행운의 여신, 사라스바티는 지식과 예술의 여신이다- 옮긴이). 그러므로 인간은 이들 부분적 힘들과 거래를 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 이기고 질병을 낫기 위해 그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다. 이런 작은 힘들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 모든 것을 아우르는 최고의 힘을 쪼개기 시작하면 하나 이상의 신성을 갖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신들도 여러 명이 되었다.

다신교의 통찰은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기 쉽다. 다신교들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최고 권력, 완벽하게 무심한 권력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편견을 지닌 수많은 권력을 믿기 때문에, 하나의 신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신들의 존재와 효험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신교는 본질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며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다.

다신교는 심지어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을 때도 피정복민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집트인, 로마인, 아즈텍인은 오시리스, 유피테르, 우이칠로포치틀리(아즈텍의 최고 신)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려 선교사를 외국에 파견하지 않았고, 이를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지도 않았다. 제국 내의 모든 피정복 민족은 제국의 신과 의례를 존중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들 신과 의례가 제국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지역 신과 의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진 않았다. 아즈텍 제국에서 피정복민들은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전을 지어야 했지만, 기존의 지역 신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세웠다. 많은 경우 제국의 엘리트 자체가 피정복민의 종교와 의례를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아시아의 키벨레 여신을, 이집트인들은 이시스를 그들의 만신전에 기꺼이 추가했다(키벨레는 소아시아 고대국가 프리기아의 대진의 여신, 이시스는 풍요의 여신이다- 옮긴이).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관용을 거부했던 유일한 신은 일신교적이고 개종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신이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신앙과 의례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수호신과 황제의 신성에 경의를 표할 것을 기대했다. 이는 정치적 충성심의 선언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들이 이를 격렬하게 거부하고 화해를 위한 모든 시도를 거절하는 데까지 나아가자 로마인들은 정치적 전복을 꾀하는 세력이라고 보아 박해로 대응했다. 이런 박해조차 주저주저하는 식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지 3백 년 만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종할 때까지, 다신교를 믿는 로마 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한 사건은 네 차례를 넘지 않았다. 지역의 행정관과 총독이 자기들 나름으로 반기독교적 폭력을 일부 일으켰을 뿐이다.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요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16~17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은 특히 악명 높다. 관련자 모두가 예수의 신성 그리고 관용과 사랑이라는 그의 복음을 믿었지만, 그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신교도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워낙 크기에 성육신成肉身하여 세상에 화신해 기꺼이 고문과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그로써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구원하고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고 믿었다. 가톨릭은 신앙이 필수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천국에 입장하려면 신자들이 교회의 의례에 참석하고 선행을 해야만 했다. 개신교들은 보상으로 주어지는 천국행은 하느님의 위대함과 사랑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가톨릭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천국행이 스스로의 선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이고,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암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신학논쟁은 16~17세기에 매우 격렬해져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는 수십만 명이나 서로 살해했다. 1572년 8월 24일, 선행을 강조하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은 하느님의 인간 사랑을 강조하는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를 공격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이 공격에서 5천~1만 명의 개신교도가 살해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프랑스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자 몹시 기뻐하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 기도회를 조직하고 조르조 바사리에게 명해 바티칸의 방 하나를 대학살에 대한 프레스코로 장식하게 했다(이 방은 현재 방문객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이 하루 동안 기독교인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다신교를 믿는 로마제국이 제국의 존속 기간을 통틀어 살해한 기독교인의 숫자보다 많았다.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선교宣敎는 본받음이 있는 가르침이어야 한다.

보편적이지 않은, 상식적이지 않은 교리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를 무시한 것으로 선교에 절대 부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