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인류의 통합/ 12. 종교의 법칙(320~329)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필사와 단상]
12. 종교의 법칙
시간이 흐르면서 다신교의 신을 믿는 신자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수호신을 몹시 좋아한 나머지 다신교의 기본 통찰에서 멀어졌다. 그들은 자신의 신이 유일신이며, 그분이 우주의 최고 권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분이 여전히 사심과 편견을 지닌 것으로 보았고, 우리가 그분과 거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일신교가 태어났다. 그 신도들은 병에서 회복되도록, 복권이 당첨되도록,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해달라고 우주의 최고 권력에게 간청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일신교는 기원전 1350년경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파라오 아케니텐은 이전까지 이집트 만신전에서 그저 그런 위치를 차지하던 이텐신이 사실은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이라고 선언했다. 아케나텐은 아텐 숭배를 국교로 삼았고 다른 모든 신에 대한 숭배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의 종교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사후 아텐 숭배는 사라지고 옛 만신전이 돌아왔다.
다신교는 여기저기서 다양한 일신교를 잉태했으나, 이런 종교들은 주변부에 남아 있었다. 스스로의 보편적 메시지를 소화하지 못한 탓이 적지 않았다. 가령 유대교는 우주의 최고 권력은 사심과 편견을 지니는데, 그분의 주된 관심은 조그만 유대국가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모를 땅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교는 다른 나라에게는 이 믿음을 권하지 않았고, 그 존속기간 대부분 동안 선교를 하지도 않았다. 이 단계를 우리는 '지역적 일신론' 단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약적 돌파구는 기독교와 함께 왔다. 기독교 신앙은 나자렛 예수가 그들이 오래 기다리던 구세주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확신시키려 했던 비전秘傳의 유대교 분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분과의 첫 리더 중 하나였던 타르수스의 바울은 만일 우주의 최고 권력이 관심과 편견을 지니고 있으며 수고롭게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화신 하셔서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면 이것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이야기이므로, 예수에 대한 좋은 말씀-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할 필요가 있다고 추론했다.
바울의 주장은 비옥한 땅에 씨를 뿌렸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류를 겨냥해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비의적 유대교 분파가 강력한 로마 제국을 접수한 것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사태 전개로 꼽힌다.
기독교의 성공은 7세기 아리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또 다른 일신교의 모델이 되었다. 이슬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구석진 곳의 작은 분파로 시작했지만, 기독교보다 더 이상하고도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다. 아라비아 사막을 벗어나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제국을 정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시기를 기접으로 일신교 사상은 세계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신론자들은 다신론자들에 비해 훨씬 더 광신적이었고, 전도에 헌신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종교가 다른 신앙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 신이 우주의 최고 권력이 아니든지, 그들이 신으로부터 우주의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전수받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일신론자들은 자신들이 단 한 분밖에 없는 신의 모든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종교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지난 2천 년간 일신론자들은 모든 경쟁상대를 폭력으로 말살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기원후 1세기 초반, 세상에는 일신론자가 전혀 없다시피 했다. 기원후 500년 경이되자 세계 최대의 제국 중 하나인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하느라 바빴다. 기원후 첫 1천 년이 마무리될 무렵에는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사람의 대부분이 일신론자였고, 대서양에서 히말라야에 이르는 여러 제국들이 자신들은 위대한 유일신에게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했다. 16세기 초에 이르자 일신교는 아프로아시아에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했으며, 남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를 향해 긴 촉수를 뻗기 시작했다. 오늘날 동아시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저런 유일신을 충실히 믿고 있으며, 세계 정치질서 또한 유일신적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다신교 내에서 에니미즘이 계속 살아남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신교 내에서 다신교 역시 살아남았다. 이론상으로는 우주의 최고 권력이 사심과 편견을 지닌다고 일단 믿는다면, 부분적 권력을 숭배해 봐야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의 문이 열려 있는데 하위관료를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실 일신론 신학은 최고신 이외의 모든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감히 그런 잡신들을 믿는 자에게는 지옥불과 유황을 퍼붓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학 이론과 역사적 실재 사이에는 늘 틈이 있기 마련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신교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계속해서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었고 우주의 최고 권력이 자신들의 세속적 욕구에 비해 너무 멀고 낯설다는 시간을 견지했다. 일신교들은 요란한 팡파르를 울리면서 대문으로 잡신들을 내쫓고서는 창문을 통해 이들을 다시 끌어들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성자들로 구성된 나름의 만신전을 발달시켰는데, 이것은 다신교의 만신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유피테르 신이 로마를 수호하고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이 아즈텍 제국을 지켰듯이, 모든 기독교 왕국에는 수호성인이 있어서 고난을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었다. 영국은 성 조지의 수호를, 스코틀랜드는 성 안드레의 비호를 받았다. 헝가리는 성 이슈트반, 프랑스는 성 마르탱이 수호했다. 도시와 읍, 전문직, 심지어 질병에도 자신만의 성인이 있었다. 밀라노는 성 앙부루아즈의, 베네치아는 성 마가의 보살핌을 받았다. 성 엘모는 굴뚝 청소부들을 보호했고, 성 마태오는 괴로워하는 세금 징수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두통이 있다면 성 아가티우스에게 기도해야 하지만, 치통을 앓는다면 성 아폴로니아가 훨씬 더 잘 맞는 기도 대상이었다.
기독교 성인들은 옛 다신교의 신과 단순히 닮기만 한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신들이 변장한 경우도 흔했다. 가령 기독교 전래 이전 켈트 섬의 최고 여신은 브리지드였다. 이 섬이 기독교화하자 브리지드도 세례를 받았다. 이제 성 브리지드가 된 그녀는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에서 오늘날까지도 가장 큰 추앙을 받는 성인이 되었다.
다신교는 일신교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신교도 낳았다. 이신교는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의 존재를, 즉 선과 악을 믿는다. 일신교와 달리 이신교에서 악은 독립적인 힘이다.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그 신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 이신교는 온 세상을 이들 두 힘의 전쟁터로 본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싸움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신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이 유명한 문제는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 관심사 중 하나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일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답하려면 지적인 곡예를 부려야만 했다. 전지전능하며 완벽하게 선한 하느님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널리 알려진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써,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하도록 허락한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약을 택하며, 일신교의 정통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선택은 반드시 신의 벌을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다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신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책을 썼다. 이런 답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일신론자들이 악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이신론자들에게는 악을 설명하기 쉽다.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이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게 선한 신에 의해서만 통치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독립된 악의 힘이 돌아다니고, 악의 힘은 나쁜 일을 저지른다.
이신론자의 견해에는 나름의 단점이 있다. 악의 문제를 풀어주기는 하지만, 질서의 문제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만일 세상을 유일신이 창조했다면, 세상이 이토록 질서가 잘 잡히고 모든 것이 동일한 법칙을 따르는 현실이 분명하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 두 대립되는 힘인 선과 악이 있다면, 둘 사이의 싸움을 관장하는 법칙을 정한 존재는 누구인가? 두 나라가 싸울 수 있는 것은 둘 다 똑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인도의 목표물에 명중할 수 있는 것은 양국에서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만일 선과 악이 싸운다면, 이들이 따르는 공동의 법칙은 무엇이며 그 법칙은 누가 정했는가?
요약하면,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베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이신교는 1천 년 이상 번성했다.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란 이름의 예언자가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교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 마침내 가장 중요한 이신교인 조로아스터교가 되었다. 그 신봉자들은 세상을 선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인 앙라마이뉴 사이의 우주적 싸움터로 보았다. 인간은 이 전쟁에서 선신을 도와야만 했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350)에서 중요한 종교였고, 나중에는 사산 제국(기원후 224~651)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이후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거의 모든 종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노시스파와 마니교 등 여러 이신교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마니교는 기원후 3~4세기 동안 중국에서 북아프리카로 퍼졌으며, 잠시나마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누르고 지배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예상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니교도들은 로마의 영혼을 기독교들에게 빼앗겼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사산 제국은 일신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 무너졌다. 이렇게 해서 이신교의 파도는 잦아들었다. 오늘날 이신론을 믿는 공동체는 인도와 중동에 한 줌 정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일신교의 물결이 정말로 이신교를 싹 쓸어낸 것은 아니었다. 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이신교에서 수많은 신앙과 관례를 흡수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일신교'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기본적 사상 일부는 사실 그 기원이나 정신이 이신교적이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강력한 악의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 악마로 부르는 것이 그런 존재다. 이 존재는 선한 신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싸울 수 있고, 신의 허락 없이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일신론자가 어떻게 그런 이신론적 신념을 품을 수 있을까(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거나 둘 다 전능하지는 않은 서로 대립되는 힘을 믿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수백만 명의 경건한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전능한 신과 독립적인 악마를 둘 다 동시에 믿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은 심지어 선한 신이 악과 싸울 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상상은 여러 가지를 고취시켰는데 이 중에는 지하드와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된다.
또 다른 이신교인 그노시스파와 마니교의 핵심 개념은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이들 종교에 따르면 선신은 정신과 영혼을, 악신은 물질과 육체를 창조했고, 인간은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의 전쟁터 역할을 한다. 일신교적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을 그렇게 정확히 구분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육체와 물질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쨌든 만물은 동일한 선한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일신론자들은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이신론자들의 이분법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선과 악의) 대립은 결국 기독교의 무슬림 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천국(선신의 영역)과 지옥(악신의 영역)에 대한 믿음 역시 그 기원은 이신론에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믿음의 흔적조차 없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산다는 주장 또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일신론은 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일신론과 이신론, 다신론, 에니미즘 유산이 하나의 신성한 우산 밑에 뒤섞여 있는 만화경이다.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 악마, 다신론적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는다.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례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諸說 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 종교일지 모른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전지전능하며 완벽하게 선한 하느님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일신론자들이 악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