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인류의 통합/ 12. 종교의 법칙(329~347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필사와 단상]
12. 종교의 법칙
지금껏 우리가 논의한 모든 종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모두가 신을 비롯한 초자연적 실체에 대한 믿음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주로 일신교와 다신교에 익숙한 서구인에게는 매우 당연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세계 종교사가 신들의 역사로만 요약되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000년부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종교가 아프로아시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도의 자이나교와 불교, 중국의 도교와 유교, 지중해 분지의 스토아철학, 견유철학, 에피쿠로스주의와 같은 신생 종교들의 특징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신조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는 신의 의지와 변덕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소산이다. 이런 자연법칙 종교들 중 일부는 여전히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신들도 인간이나 동식물 못지않게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고 보았다. 신들은 코끼리나 호저처럼 생태적 지위를 차지했으며, 신들도 코끼리와 다름없이 자연법칙을 멋대로 바꿀 수 없었다. 대표적 사례가 고대 자연법칙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다. 불교는 지금도 주요 종교로 남아 있다.
불교의 중심인물은 신이 아니라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다. 불교 전통에 의하면 고타마는 기원전 500년경 히말라야에 있던 작은 왕국의 후계자였다. 이 젊은 왕자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고통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 모두가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우연한 재난뿐 아니라 고민, 좌절, 불만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 모두가 인간 조건의 필수적인 부분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지식과 소유물을 얻으며, 아들딸을 낳고, 집과 왕궁을 짓는다. 하지만 무엇을 이룩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부자를 꿈꾼다. 1백만을 가진 사람은 2백만을 원한다. 2백만을 가진 사람은 1천만을 원한다. 심지어 부와 명성을 가진 사람도 만족하는 일이 드물다. 이들 역시 끝없는 괴로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살다가 결국 늙고 병들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 사람이 쌓은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삶은 극심하고 무의미한 생존 경쟁이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타마는 29세에 가족과 재산을 뒤로하고 한밤중에 왕궁을 빠져나왔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며 집 없는 방랑자로 인도 북부를 구석구석 떠돌았다. 그는 아시람(힌두교 수행처-옮긴이)들을 방문해 구루들의 발치에 앉았지만, 아무것도 그를 완전히 해방시켜주지 못했다. 모종의 불만이 항상 남아 있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완전한 해방의 길을 찾을 때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번뇌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6년에 걸쳐 인간 번뇌의 핵심과 원인과 치유법에 대해 명상을 했고, 마침내 그 번뇌의 원인은 불운이나 사회적 불공정, 신의 변덕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번뇌는 사람의 마음이 행동하는 패턴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고타마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게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 마음은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고통 같은 불쾌한 경험을 할 때 매우 분명해진다. 고통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불만스럽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즐거운 일을 경험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즐거움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거나 더 커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를 몇 년씩 꿈꾸지만, 실제로 찾았을 때 만족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상대가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는가 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있었는데 너무 값싸게 안주했다고 느낀다. 심지어 용케 둘 다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리라.
위대한 신들은 우리에게 비를 보낼 수 있고, 사회제도는 정의와 좋은 의료를 제공할 수 있으며, 우연한 행운은 우리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의 기본적 정신 패턴을 바꾸지는 못한다. 가장 위대한 왕이라 할지라도 슬픔과 번민으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며 더 영원히 큰 즐거움을 뒤쫓는 번뇌 속에 살 운명이다.
고타마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 당신이 슬픔을 경험하되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슬픔 속에 풍요로움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되 그것이 계속 유지되며 더 커지기를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계속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업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의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 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이 같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고타마는 이런 명상기법을 일련의 윤리적 규칙들 위에 구축했는데, 그 규칙들은 우리가 집착이나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실제 경험에 초점을 맞추기 쉽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살생, 음행, 도둑질을 피하라고 했는데, 이런 행동은 반드시 집착(권력과 감각적 기쁨, 그리고 부에 대한)의 불을 지피기 때문이었다. 불이 완전히 꺼지면 집착은 완벽한 만족과 평온의 상태와 자리를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열반은 무자 그대로 '불 끄기'란 뜻이다). 열반에 이른 사람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 이들은 실재를 극도로 분명하게 경험하며, 환상이나 망상에서 자유롭다. 이들도 분명 불쾌감이나 고통에 맞닥뜨릴 테지만, 그런 경험은 이제 아무런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고통받지 않는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는 그 사진이 열반에 들었으며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그는 '부처'로 알려졌다.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부처는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발견을 전하는 데 바쳤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한 가지 법칙으로 요약했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법(Dharma, 다르마)으로 알려진 이 법칙은 불교도에게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다. 현대 물리학에서 E가 늘 MC2과 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불교도는 이 법칙을 믿고 모든 행동의 지주로 삼는 사람들이다. 한편 신에 대한 믿음은 이들에게 그리 중요치 않다. 일신론적 종교의 제일 원리는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인 반면 불교의 제일 원리는 "번뇌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불교는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신들을 비와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강력한 존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 신들은 집착에서 고통이 일어난다는 법칙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집착에서 해방되었다면, 어떤 신도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일단 어떤 사람의 마음에서 집착이 일어나면, 우주의 어떤 신도 그를 번뇌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일신교적 종교와 아주 비슷하게, 불교 같은 근대 이전의 자연법칙 종교 역시 신에 대한 숭배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풍요난 정치권력 따위가 아니라 번뇌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불교도의 99퍼센트는 열반에 도달하지 못했고, 설령 언젠가 내세에서 열반을 이루기를 원했다 할지라도 현세의 삶 대부분은 세속적 성취를 추구하는 데 바쳤다. 그래서 이들은 인도의 힌두신, 티베트의 본교의 신, 일본의 신도神道의 신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을 계속 섬겼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불교 분파들이 부처들과 보살들로 구성된 만신전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해탈할 능력을 지닌 인간(보살)과 비인간적 존재(부처)이지만 연민 때문에 해방을 포기했다고 했다. 아직도 불행의 덫에 빠져 있는 무수한 존재들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신을 숭배하는 대신에 많은 불교도들은 이런 깨달은 자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열반에 이르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할 뿐 아니라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아시아 곳곳에서 수많은 부처와 보살이 비를 부르고, 전염병을 막고,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이기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도와 색색의 꽃과 향과 쌀과 사탕을 받는 대가로 말이다.
지난 3백 년은 흔히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점차 중요성을 잃어가며 세속화가 진행된 시기로 묘사된다. 유신록적 종교에 대해서라면 대체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연법칙 종교를 고려한다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근대는 강력한 종교적 열정의 시대, 전대미문의 포교 노력과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시대였다. 수많은 자연법칙 종교가 근대에 새로이 등장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가 그런 예다. 이들은 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일 뿐이다. 만일 종교를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인간의 규범과 가치 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면, 공산주의는 이슬람교에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종교다.
이슬람교는 물론 공산주의와 다르다. 세상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는 전능한 창조주 신의 명령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공산주의는 신을 믿지 않았다. 불교 역시 신을 가차 없이 다루지만, 그럼에도 보통 종교롤 분류된다. 불교도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행동을 인도해야 할 초인적 질서와 불변의 법칙을 믿었다. 불교도들은 자연법칙이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믿는 데 비해, 공산주의자들은 자연법칙이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믿었다.
유사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는 경전과 예언서가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궁극적 승리와 함께 역사는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같은 책이다. 공산주의는 나름의 기념일과 축제가 있었는데, 5월 1일 노동절과 10월 혁명 기념일이 그런 예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능통한 신학자들이 있었으며, 소련 적군의 모든 부대에는 인민위원이라 불리는 지도 신부가 있어서 병사들과 장교들의 신심을 모니터링했다. 순교자와 성전이 있었고, 트로츠키주의와 같은 이단이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는 광적이고 포교에 열심인 종교였다. 독실한 공산주의자는 기독교나 불교도가 될 수 없었으며, 생명을 바쳐서라도 마르크스와 레닌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런 식의 추론에 마음이 매우 불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꼭 그래야만 기분이 나아진다면 공산주의를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계속 불러도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세상의 신념들을 신 중심의 종교와 자연법칙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신 없는 이데올로기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일관성이 있으려면, 적어도 불교, 도교, 스토아철학의 일부 분파는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목록에 올려야 한다. 그리고 거꾸로 많은 근데 이데올로기 속에 신에 대한 믿음이 계속 존재하며 그중 일부, 대표적으로 자유주의는 그런 믿음이 없다면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근대의 모든 신념들의 역사를 조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이들은 일신교나 대중불교 못지않게 혼합적이다. 불교도가 힌두교의 신들을 숭배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일신교도들이 악마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전형적인 미국인은 동시에 국수주의자(역사에서 특별한 사명을 지닌 미국이란 국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서, 자유시장 자본주의자(자유 경쟁과 사익 추구가 번영하는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는다)면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인간이 그 창조주로부터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일 수 있다.
이중 국수주의는 18장 (끝없는 혁명)에서 이야기할 것이고, 자본주의는 현대 종교들 중 가장 성공적인 존재이니 16장 <자본주의 교리> 전체를 할애할 것이다. 그때 그 주요 신앙과 의례를 상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그러니 이 장의 나머지에서는 인본주의적 종교에 대해 살펴보자.
유신론적 종교는 신을 숭배한다. 인본주의적 종교는 인간, 좀 더 정확하게는 호모 사피엔스를 신성시한다. 인본주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특유의 신성한 성질이 있고 이 성질은 다른 모든 동물이나 다른 모든 현상의 성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믿음이다. 인본주의자는 호모 사피엔스 고유의 성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그것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최고의 선은 호모 사피엔스의 선이다. 나머지 세상 전부와 여타의 모든 존재는 오로지 이 종을 위하여 존재한다.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신성시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 기독교의 경쟁 분파들이 신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인본주의는 '인간성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엔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 - 인간성의 목소리 -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가령 자유주의자들이 고문과 사형에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 살인자는 세상의 질서를 침해하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존재로 여겨졌다. 세상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서는 범인을 고문하고 공개 처형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의 시대 런던이나 파리 주민들에게 끔찍한 처형을 참관하는 것은 인기 있는 오락이었다. 한편 오늘날 유럽에서 살인은 인간성이라는 신성한 본성에 대한 침해로 여겨진다. 요즘 유럽인들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고문하고 처형하지 않는다. 그 대신 범죄자들을 최대한 '인도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처벌함으로써, 인간으로서 그의 존엄을 지키고 심지어 회복시킨다. 살인범의 인간성을 존중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되새기고, 질서는 회복된다. 우리는 살인범을 보호함으로써 그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신성시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일신론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인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전통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런데 영원한 영혼과 창조주 하느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나치가 다른 인본주의 분파와 구별되는 점은 '인간성'에 대해 진화론에 깊이 감화된 좀 색다른 정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다른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치가 인류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아리아인을 보호육성해야 하고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정신병자 같은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된 종류들은 격리하거나 심지어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치는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자체가, 네안데르탈인 같은 '하등한' 집단은 멸종한 데 반해 고대 인류 중 한 '우월한' 집단은 진화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집단은 애초에 서로 다른 종족에 불과했지만, 각자의 진화 경로를 따라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나치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이미 각기 고유한 자질을 지닌 여러 개의 다른 종족으로 나뉘었다. 그중 하나인 아리아인은 최상의 자질을 자랑했다.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고결하고, 근면했다. 따라서 아리아인은 인류를 초인류로 바꿀 잠재력이 있었다. 다른 종족, 예컨대 유대인이나 흑인은 열등한 자질을 지닌 오늘날의 네안데르탈인이었다. 이들이 번식하게 놓아둔다면, 특히 아리아인과 결혼하게 방치한다면, 모든 인간 집단의 품질을 떨어뜨리고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을 가져오리라고 했다.
이후 생물학자들은 나치 인종이론의 정체를 폭로해 왔다. 특히 1945년 이후 시행된 유전학 연구에서, 다양한 인간 혈통 사이의 차이는 나치가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1033년의 과학 지식수준을 고려하면, 나치의 믿음이 한계를 넘었다고 보기 힘들었다. 각기 다른 인종이 존재한다는 것, 백인이 우월하다는 것, 이 우월한 인종을 보호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서구 엘리트 대부분이 갖고 있었던 믿음이었다.
서구의 가장 유수한 대학에 있던 학자들은 당시 가장 정통적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해 백인이 아프리카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에 비해 더욱 지능이 높고 윤리적이며 기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른바 증명해 냈다. 워싱턴과 런던, 캔버라의 정치인들은 백인종에 불순물이 섞이거나 퇴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령 중국인이나 심지어 이탈리아인이 미국이나 호주 같은 '아리안' 국가로 이민해 오는 것을 제한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이런 입장은 단지 새로운 과학적 연구결과가 출판되었기 때문에 바뀐 게 아니었다. 정치사회적 발전이 이보다 훨씬 강력한 변화의 엔진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무덤뿐 아니라 인종차별주의 전반의 무덤을 팠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적들로 하여금 '우리'와 '그들'을 분명히 구분 짓도록 강요했다. 그 나이 이데올로기는 너무나 인종차별적이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는 이후 서구에서 신뢰받지 못했다. 하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백인 우월주의는 적어도 1960년대까지 미국 정치의 주류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었다. 유색인종의 호주 이민을 제한하는 백호주의白濠主義는 1966년까지 유지되었다. 호주 원주민은 1960년대까지 동등한 정치권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선거에서 투표권조차 없었다. 시민 구실을 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치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았다. 나치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인권, 공산주의와 싸운 것은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찬양하며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자연선택이 작동하게 내버려 두어서 능력 없는 자들을 도태시키고 가장 우수한 자들만 생존하고 번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는 약자를 원조함으로써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생존을 허용할 뿐 아니라 번식할 기회를 주어 자연선택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사장 우수한 인간은 적응하지 못한 퇴화자들의 바다에서 필연적으로 익사할 것이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류의 적응력은 점점 떨어져 멸종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1942년 독일 생물학 교과서의 '자연과 인간의 법칙' 장에서는 모든 존재는 무자비한 생존 투쟁을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이것이 자연의 최고 법칙이라고 설명했다. 교과서는 식물이 어떻게 땅을 두고 싸우고 딱정벌레가 짝을 찾기 위해 어떤 투쟁을 하는지 설명한 다음 이런 결론을 내린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힘들고 가차 없지만,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투쟁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모두 제거하고 생존능력이 있는 것을 선택한다. [.....] 이 자연법칙은 논의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살아 있는 존재가 자신의 생존을 통해 이 법칙을 보여준다. 이 법칙은 용서가 없다. 여기 대항하는 자들은 싹쓸이를 당할 것이다. 생물학은 우리에게 동식물에 대해 알려줄 뿐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따라야 할 법칙도 보여준다. 이 법칙에 따라 살고 투쟁해야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어준다. 삶의 의미는 투쟁이다. 이 법칙을 어기는 죄를 짓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진저!"
그다음에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인용된 문구가 나온다,
"자연의 강철 논리와 싸우려는 사람은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생명을 부여한 바로 그 원리와 싸우는 것이다. 자연과 싸우는 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다."
세 번째 밀레니엄의 여명기인 지금, 진화적 인본주의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히틀러와의 전쟁이 끝난 후 60년간, 인본주의를 진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금기였다. 생물학적 방법에 의한 호모 사피엔스의 '업그레이드'를 옹호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프로젝트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하급 인종이나 열등한 집단을 멸절시키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 생물학에 대한 우리의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 초인간을 만드는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간극을 그다지 오래 무시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적 정치 사법 제도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누거나 바꿀 수 없는 이 본성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내면에 자유롭고 영원한 영혼이 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앙의 환생이다. 하지만 지난 2백 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이런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내적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기서 아무런 영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침팬지, 늑대, 개미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힘 말이다.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범죄자들을 최대한 '인도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처벌함으로써,
인간으로서 그의 존엄을 지키고 심지어 회복시킨다.
살인범의 인간성을 존중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되새기고, 질서는 회복된다.
우리는 살인범을 보호함으로써 그의 잘못을 바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