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의 새로운 지평

시간의 책임과 몸의 생태학

by 김명준

4월 29일과 6월 15일, 나는 브런치 글에서 자연스러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서로 다른 두 사고의 교차점에서, 여러 아이디어들이 떠올라 새 글을 적는다.




아직 오지 않은 존재들의 '되기'

4월 글에서 들뢰즈의 "되기"를 통해 존재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면, 이제 그 변화를 미래까지 확장해서 생각해야 한다. 변화는 지금 이 순간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아직 진화하지 않은 생명들, 심지어 아직 상상하지 못한 가능성들까지도 현재의 선택 속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환경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변화 가능성"에 가하는 폭력이다. 우리가 오늘 배출하는 탄소 한 분자는 100년 후 어떤 아이의 호흡을 힘들게 할 것이고, 어떤 동물이 살아갈 길을 막아버릴 것이다. 들뢰즈가 말한 네트워크적 연결에서 보면, 현재와 미래는 떨어진 시점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변화 과정이다.

6월 글의 "초원초적 입장"이 공간적 확장이었다면, 이제는 시간적 확장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시대에 태어날지 모른다는 무지의 베일을 씌워보자. 21세기 초반의 풍요로운 인간일 수도 있고, 2080년대 기후 재난 속의 난민일 수도 있다. 이 관점에서 지속가능성은 선택이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는 자기 보호 본능이 된다.




몸과 자연의 깊은 연결 : 새로운 생태 감각

4월 글에서 메를로퐁티의 몸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여전히 개인의 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살(la chair)" 개념은 훨씬 깊다. 살은 보는 나와 보이는 것, 만지는 나와 만져지는 것 사이의 원래부터 있던 연결이며, 주체와 객체로 나누기 전에 이미 작동하는 존재의 기본 요소다.

이를 생태계로 넓히면 놀라운 깨달음이 온다. 내 폐 속의 산소는 숲의 나무들과 나누는 호흡이고, 내 몸의 미생물들은 흙 속 세균들과 이어져 있다. 메를로퐁티가 "몸들 사이의 연결"이라 부른 것은 단지 사람들끼리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참여하는 거대한 감각의 그물이다.

환경 파괴가 왜 이토록 직관적으로 "잘못되었다"라고 느껴지는가? 그것은 도덕적 판단 이전에, 우리 몸이 이미 생태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미세입자가 혈관을 떠다닐 때, 대기 중 미세먼지가 폐에 쌓일 때, 우리는 개념이 아니라 몸으로 생태계의 아픔을 직접 느낀다.

6월 글에서 펭귄을 구한 제작진들의 선택을 분석했지만, 이제는 그 선택이 몸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느낀 것은 추상적 윤리가 아니라 생명의 몸이 보내는 직접적 신호였을 것이다. 죽어가는 펭귄들의 몸짓이 인간의 몸에 바로 전해지는 연결된 몸의 경험 말이다.




기술과 자연의 새로운 변증법

4월 글에서 자연을 창조적 가능성의 공간으로 재정의했지만, 21세기의 기술들은 이 정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 지구공학 같은 기술들이 만드는 새로운 존재들과 현상들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일까?

CRISPR로 편집된 유전자, GPT가 생성한 텍스트, 태양광 패널이 모은 에너지. 이들은 모두 인간의 의도가 개입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에서 보면, 기술 역시 생명의 창조적 충동이 발현된 것이다. 인간의 뇌도 진화의 산물이고, 그 뇌가 만든 기술도 결국 자연의 창조성이 현실화된 형태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6월 글에서 논의한 "종족을 넘어선 책임" 관점에서 보면, 기술의 자연스러움은 그것이 더 많은 존재들의 "되기"를 열어주는가로 판단되어야 한다. 기후공학이 일부 지역을 구하더라도 다른 생태계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전체적 되기를 축소시키는 반자연적 기술이다. 반면 재생에너지나 생물다양성을 늘리는 기술들은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자연스러운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도 여기서 도움이 된다. 그들에게 기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욕망과 에너지들이 새롭게 배치되는 장치다. 생태적 기계는 인간과 자연, 기술과 생명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배치다. 이 관점에서 도시농업, 환경정화 기술, 동물과 로봇이 협력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미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수 있다.




함께 시작하는 힘 : 인간과 자연의 공동 행동

4월 글에서 아렌트의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했을 때, 나는 여전히 개인의 능력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태위기 시대에는 이 개념을 집단적이고 여러 종족이 함께하는 차원으로 넓혀야 한다.

새로운 시작은 더 이상 한 개인이나 한 종족만의 행동이 아니다. 기후 활동가들이 거리로 나설 때, 과학자들이 새로운 데이터를 발표할 때, 정책입안자들이 법안을 통과시킬 때, 거기에는 수많은 자연의 존재들도 함께 참여한다. 빙하가 녹으며 보내는 신호, 산호가 하얗게 변하며 발하는 경고, 철새들이 바뀐 이동경로로 전하는 메시지들이 모두 이 공동의 행동에 참여한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이런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하는 시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인간과 자연의 존재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며 현실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6월 글의 펭귄 사례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볼 수 있다. 펭귄들의 위험 신호, 카메라의 기록, 제작진의 윤리적 고민, 시청자들의 반응이 모두 하나의 연결망을 구성하며 새로운 자연-문화의 시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공동의 시작하는 힘은 기존의 정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인간만의 정치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참여하는 "다양한 존재들의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들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뉴질랜드의 사례나, 생태계를 헌법적 주체로 인정하는 볼리비아의 헌법 같은 것들이 이런 새로운 정치의 실험들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책임 : 최악을 막는 윤리

6월 글의 "초원초적 입장"은 근본적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알 수 없다. 이런 알 수 없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윤리적 태도를 가져야 할까?

한스 요나스의 책임윤리학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기술 문명의 힘이 거대해진 상황에서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그것을 예방하는 것이 윤리적 의무가 된다는 것이다. 4월 글에서 언급한 "인류의 멸망"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예방해야 할 가능성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윤리학은 단순한 비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더 넓은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준다. 확실한 것이 없다면, 가장 포용적이고 창조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선택권 확보"다. 어떤 생명체가 미래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할지 모르니까, 가능한 한 많은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이다.

이런 예방 원칙은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내가 정확히 어떤 미래를 맞을지 모르니까, 가장 회복력 있고 적응력 있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지속가능한 소비, 지역 공동체와의 연결, 다양한 기술과 지식의 습득 같은 것들이 개인적 차원의 예방 윤리학이다.




자연스러움의 새로운 실천

결국 자연스러움은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4월 글에서 "방향을 만드는 자연스러움"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매 순간 어떤 자연을 선택하고 창조할 것인지 결정한다.

6월 글의 펭귄 제작진들이 보여준 것은 이런 창조적 자연스러움의 구체적 실천이었다. 그들은 "원래의 자연"을 보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펭귄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자연"을 창조했다. 그 자연은 순수하지도 오염되지도 않은, 책임과 연대로 엮인 관계의 자연이었다.

메를로퐁티의 몸, 들뢰즈의 변화, 아렌트의 시작하기가 모두 만나는 지점이 여기다. 우리의 몸이 생태계와 연결되고, 현재의 변화가 미래와 이어지고, 개인의 시작하기가 집단의 행동 능력이 되는 곳. 그곳에서 진정한 자연스러움이 만들어진다.

무의미함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했던 4월의 다짐이 이제는 구체적 실천의 모습을 갖추었다. 시간을 넘나드는 책임, 몸을 통한 생태적 감수성, 기술과의 창조적 협력, 여러 존재들과의 연대, 불확실성 앞에서의 예방적 사랑. 이 모든 것이 내가 되고 싶은 자연스러움의 내용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나는 의미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이제 그 의미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존재들, 말할 수 없는 생명들,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들과 함께 만드는 의미다. 이것이 21세기의 자연스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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