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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기어코 두명을 더 태우셨다

순대국



순대국



새벽에 주방창을 여니 송곳같은 바람이

기다린듯 헤집고 들어온다.


찜기의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부추순대를 올려서 한번 쪄둔다. 양념 (다대기) 은 다진 마늘에 고춧가루 듬뿍 넣고 까나리 액젓이나 참치액젓 (없으면 국간장), 매실액 조금, 참기름 조금 넣고 섞어서 불려둔다.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사골 국물을 끓이다가

마지막에 미리 쪄두었던 순대를 넣고 데우기만 하여 그릇에 담는다.


처음부터 사골국물과 순대를 함께 끓이면 순대가 다 풀어져 국물이 탁해지고 지저분해 진다. 그릇에 담고 대파 쫑쫑 썰어 올리고 들깨가루 듬뿍 올려서 먹으면 된다.




어릴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 3남매는 늘 고민에 휩싸였다.


“얘들아,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엄마는 주섬주섬 가방을 싸시고 우리 3남매는 인상을 찌푸리며 겨울옷을 겹겹이 입었다. 아버지의 “ 자, 출발이다.” 소리는 우리 귀에는 “ 단단히 각오해” 라는 소리로 들렸다.


7남매중 셋째셨던 우리 아버지는 마을에서 인정해주는 효자였고 그런 효자와 연애하여 결혼까지 한 우리 엄마는 셋째지만 맏며느리의 삶을 살았어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삿날이 되면 우리는 모두 그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시골에 가야했다. 예전엔 겨울이 왜 그리 추웠던지 아무리 옷을 많이 입고 장갑을 껴도 손가락, 발가락에 동상이 자주 걸렸다.


여기서 잠시 외가와 친가를 비교해 보자면, 외갓집은 면단위 소재지에 있었고 외할아버지가 양조장을 하셨던 분이라 집도 양옥집, 집안은 춥지도 않고 농사도 짓지 않으셨다.


그런데 친가는 정반대였다. 대대손손 농사를 지은 집안, 집은 기와집이었으니 샷시가 없어 지붕끝에 고드름이 늘 맺혀 있었다. 마당 한 켠엔 외양간도 있어 늘상 소여물 냄새로 가득하였고, 마당은 쌓인 눈이 녹아 질척질척했다. 정지(부엌의 경상도 사투리)에는 커다란 가마솥 두개가 늘 끓고 있었다. 아궁이에는 여자들이 늘 쪼그리고 앉아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불을 지펴줘야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 3남매는 친가에 가는 날이면 전날밤부터 잠도 못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제삿날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도 휴가를 내시고, 우리 3남매도 학교에 허락을 받아서

과일이며 고기며 가득 사서 무궁화호나 비둘기호를 타고 안동역으로 향했다.


문제는 안동역에 도착한 다음부터다. 친가는 안동군(지금은 안동시)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데 마땅한 교통편이 없다는 거였다. 70년대까지도 그곳엔 버스도 없었던 시절이라 항상 우리가족 5명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0리 길을 걸어서 갈 것인가, 거금을 들여 택시를 탈 것인가.


10리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매번 우리가 안동역에 도착하면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걸어가는 10리 길은 점점 밤이 되어 앞도 보이지 않았고, 논두렁에 쌓아 놓은 볏단을 보고 귀신인줄 알아 기절 전까지 가기도 했더랬다. 길이 포장되어 있지 않아 예쁜 겨울 부츠를 신고 걷다보면 여기 저기 소똥을 밟아서 그 부츠는 서울와서 버려야 했다.


꼬맹이들에게 10리길은 천리길 같았다. 그 길때문에 두렵고 시골에 가기가 싫었다.


그날도 우린 안동역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너무 춥고 짐도 많았던 탓에 결국 택시를 타게 되었다.

앞자리에 기사님과 아버지가 타시고 엄마와 나, 여동생이 뒷자리에 앉고 남동은 엄마의 무릎위에 앉았다가 엄마가 힘들면 두 누나의 무릎위로 옮겨가며 그렇게 힘들게 타고 갔다.


그렇게 반쯤 갔을까? 이미 밖은 어두컴컴해졌고  기사님은 빙판이 된 들길을 시속 10km도 안되게 기어가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기사님한테 차를 세우라 하셨다. 그리고 청천벽력같은 한마디.

“ 기사님, 저기 가고 있는 저 사람들이 우리 옆집 아재하고 아지매거든요.”


잠시후 나와 내 여동생은 남동생과 같은 처지가 되어 얼굴도 모르는 그 아지매와 아재의 무릎위 앉아서 가게 되었다. 그렇게 7명이 (기사님 포함 8명) 택시 안에서 복닥거리며 가고 있는데 갑자기 뒷문이 열리면서 아지매 무릎위에 있던 내가 휭하고 튕겨나가 논두렁에 콱 처박히고 말았다.


그 작은 택시 (그때의 택시 내부는 정말 았다) 뒷자리에 성인 3명이 탔으니 얼마나 꽉 찼겠나.

나중에 승차한 일면식도 없는 그 아지매가 문을 단단히 닫지 않아서 그 문이 열려버리고 나는 팝콘처럼 튕겨 나간 거였다. 온몸이 진흙으로 젖어서 덜덜 떨었고 새로 맞춘 친칠라 털이 달린 빨간 코트는 바로 얼어버려 부러질 것만 같았다. 끔찍했다.


그 난리속에 밤 12시가 넘어서 도착했고 시골 친척들은 아버지가 풀어 놓는 서울서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신기하게 열어보았다. 아버지의 서울 이야기를 환타지 소설 버금가게 듣고 계셨다.


그때 큰엄마가 추우니 어서 한그릇 먹으라면서 내오신게 다 풀어진 순대국이었다.

얼마나 여러번 데우셨는지 순대는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형체가 없었고 그저 불그스름한 국물이 다였다.


그렇지만 얼마나 춥고 배고팠는지, 어린애가 그 순대국을 한사발 먹어치웠다. 옆에서 어른들의 수근거림이 들렸다. “하이고야, 얼라가 순대국을 저래  묵네.” 그후로 한그릇 더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건 맛있어서가 아니라 어른들의 칭찬에 호기를 부려 더 먹었던듯 한데, 아무튼 그날밤 나는 기침과 오한 속에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아버지가 그 작은 택시에 이웃을 더 태워 우리 식구들이 너무 힘들었던걸  오랫동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두고 두고 그 일을 이야기 하면서 아버지가 너무 하신거라며 탓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추운 겨울밤 걷는 10리길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운 길인지를 알고 계셔서

그 아지매와 아재를 모른척 할 수가 없었을다.

이 모든게 이해가 된 건 이미 아버지가 천국에 가신 다음이었다.


그랬던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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