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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30원

분식 3총사 (떡볶이, 어묵탕, 김밥)

분식 3총사


식구들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좋아진 점이 딱 한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의 기상 시간이 1시간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7시쯤 일어나도 늦지 않다.


긴 연휴동안 잘 먹고 잘 쉬었다. 기름진 것도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먹고 싶다는 걸로 한 상 차려본다.

떡볶이는 미0리 떡볶이 소스가 해결해 주었다.


냉동실에 넉넉히 얼려둔 김밥 한 줄 녹여서 계란물을 입혀 앞뒤로 고루 구워 준다.

어묵탕은 좀 심혈을 기울였다.

멸치, 다시마, 새우 한 줌, 무 몇토막, 통마늘 , 양파 넣고 끓이다가 중간에 다시마 건져내고 무가 푹 익을때까지 끓인 후 건더기들을 건져 낸다.


그 국물에 어묵과 청양고추, 붉은고추 넣고 다시 끓이면서 국간장과 참치액젓으로 간을하고 고운 후추를 톡톡 뿌려준다.

 

늦은 아침을 떡볶이, 김밥, 어묵탕으로 먹는다.

우리집은 특별히 아침메뉴가 따로 정해져 있진 않다.

아침에 보쌈을 먹기도 하고, 이렇게 분식도 먹고, 간단한 샌드위치나 한식을 먹기도 한다.





뜨거운 어묵탕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내가 어릴때 우리 아버지는 주말에 절대 늦잠을 재우지  않으셨다.

새벽 6시만 되면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에도 집안 창문을 모두 열어재끼셨다.

우리 3남매는 추우니까 침대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꼼짝않고 쥐죽은듯 있곤 했더랬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방문을 버럭 열고 들어 오셔서 이불을 걷어버리시면  우리는 도망갈 곳을 찾아 온 집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아버지 손에 붙잡히면 (주로 내가 잡혔다) 주말 아침에 어김없이 나를 데리고 산으로 가셨다.


우리 동네에는 산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때는 그 산을 ‘ 봉원산’이라 불렀었고

아버지 손에 끌려서 하염없이 올라가다 보면 봉원사라는 절도 있었다. 아버지한테 잡히는 날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산을 따라 올라가야 했었는데 울며 따라가는 나에게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있다.


“ 저 산 위에 올라가면 오뎅 아저씨가 있다. 그 오뎅에 막걸리 한 잔하면 정말 끝내주거든 .

아빠랑 올라가서 오뎅 한그릇 먹자.”


그런 아버지의 말씀에 낚여(?)서 처음 올라갔던 날. 산 꼭대기쯤 닿았을때 낡은 리어커 한 대가 보였다.

어른들이 두런두런 그 리어커 앞에 서서 무언가를 후루룩 먹고 있었고 아버지도 그들 틈에서 노란 양은 공기 두 개를 들고 오셨다. 어느새 아버지 손에는 막걸리가, 내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탱글탱글한 오뎅탕 한 공기가 들려있었다. 그 오뎅탕 맛을 본 다음에는 주말 새벽에 자진해서 일어나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 산에 갔더랬다.


노란색 양은 공기안에 담겨진 오뎅탕을 내게 주시기 전 아버지가 어떤 의례식처럼 반드시 하시던게 있다. 국물은 아버지가 모두 드시고, 입으로 호호 불어낸 다음 고춧가루와 파가 듬뿍 들어간 양념장을 조금 얹으신 후에 나의 작은 손에 쥐어주신 것.


그때마다 왜 내 오뎅 국물을 아빠가 다 먹냐면서 떼를 쓰고 울었다. 앙앙 운동화 뒷꿈치가 흙범벅이 되도록 땅을 비벼대며 울면서- 내 오뎅탕 뺏어 먹지 말고 아빠도 사먹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내가 울던 말던 아버지는 늘 오뎅탕 한 공기에 막걸리 한 잔이었다.


그때 그 오뎅탕은 50원이었다.

내가 금액을 기억하는 것은, 집을 나설때마다 아버지가 항상 100원을 챙기셨고, 오뎅탕 50원, 막걸리 20원, 나머지 30원은 주머니에 넣고 짤랑거리며 내려오셨기때문이다.

어릴때는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왜 나의 오뎅국물을 드신건가.


어른이 된 후에 이해가 되었다.

양은 공기에 담겨 나오는 방금 만들어진 오뎅탕은 무진장 뜨거웠을게다. 양은 공기도 뜨겁고 오뎅탕도 뜨거우니 국물을 얼른 아버지가 드셔서 없애고 남은 오뎅은  열을 식혀서 주셨던 것이다.

행여 입이라도 데일까 그리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맛있는 오뎅탕 대신 막걸리 한 잔으로 만족하시며 30원을 남기셨던 것이다.


우리집 투박하고 작은 고추장 단지엔 아버지가 그렇게 남기신 30원들이 모여  어느 순간엔 동전이 가득해졌다. 그 동전항아리를 털 때 엄마와 나는 마치 흥부네 박을 타듯 5원짜리, 10원짜리, 50원짜리… 세다가 간혹 100원짜리가 나오면 환호성도 질렀다. 그렇게 단지를 쏟은 날은 엄마가 ‘처갓집 양념통닭’이란걸 사주셨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때 배웠다. 티끌이 모이면 어떻게 된다는 걸.


만약 아버지가 오뎅탕을 2그릇 사셨다면 30원은 남을수가 없었겠고 우린 양념통닭도 먹을 수 없었을 거다. 아버지가 남기신 30원이 얼마나 귀한 돈인지 모른다. 눈치도 없이 내 오뎅탕 국물을 왜 뺏어먹냐며 떼썼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국물이 아니라 내 오뎅 한 개를 맛보시라고 드렸어야 하는데.


우리집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그럭저럭 부족함 없이 우리를 키우셨는데

거기엔  알뜰히 살림하신 엄마의 노고도 있었고

드시고픈 오뎅을 한사코 마다하신 아버지의 작은 희생들도 있었다.


이 또한 모두 하늘나라로 가신 다음

내 새끼 먹인다고 오뎅탕을 끓이는 이제서야 알게 되니

참 어리석다.



덧.

나도 결혼하면서부터 동전을 모은다.

어릴적 항아리보다는 좀 예쁜 꽃병에 모으는데

이 꽃 병에 한가득 동전이 모이면 4-5만원정도 나온다.

아이들이 어릴때는 아이 손에 쥐어서 동사무소에 기부도 하고

가끔은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기도 했다.


동전을 헤아리는 아침,

10원짜리 동전에서 아버지가 보인다.







( 나의 동전 항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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