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라, 더 높이 날고 싶다면
삶을 갉아먹는 주체가 다름 아닌 지금 다니는 직장이라면 어떨까. 원하지 않는 일임에도 억지로 출근길에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 당장의 손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매달 꽂히는 월급이 주는 얄팍한 안정감은 사실 삶을 좀먹는 마취제와 같다. 인간의 본능적인 '손실 회피 편향'에 빠져 정작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룬 채, 우리의 인생은 냄비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연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바닥으로 추락한 뒤 다시 일어서는 편이 낫다. 이는 단순한 자기계발적 수사가 아니라 경제학, 생물학, 화학의 보편적 원리에 기반한 단단한 삶의 원리이다.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동력을 '창조적 파괴'라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경기 침체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다. 이익도 내지 못하면서 대출 연장으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들을 시장에서 쓸어버리는 필수적인 정화 작용이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다니는 직장 생활 역시 지속될 수 없는 생명 연장에 불과하다. 문제를 외면하고 덮어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훗날 복리로 불어나 더 큰 위협으로 돌아올 뿐이다. 스스로 침체를 선언하고 기존의 관성을 멈춰 세울 수 있어야, 비로소 개인의 시간과 에너지가 진정 필요한 곳에 재배치될 수 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양분이 끊임없이 공급되면 우리 몸은 나태해지고 내부에 노폐물이 쌓인다. 반면, 간헐적 단식 등을 통해 의도적인 '결핍 상태'를 만들면 세포는 생존을 위해 내부에 쌓인 낡고 병든 단백질 찌꺼기를 스스로 분해해 에너지로 사용한다. 이것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오토파지(Autophagy, 자가포식)'의 원리다. 인생에서의 추락은 곧 영양 공급의 차단을 의미한다. 월급이라는 영양분이 끊길 때, 비로소 삶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무의미한 관성과 습관이 분해되고 본질적인 성찰이 시작된다.
화학적, 물리적 반응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작동한다. 180°C가 넘는 고열이라는 극단적 스트레스가 가해질 때, 평범한 생고기는 내부의 아미노산과 당이 재결합하며 수백 가지의 폭발적인 풍미를 낸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이다.
강철도 마찬가지다.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차가운 물에 급랭시키는 극단적인 온도 변화는 금속의 분자 구조를 조밀하게 재배열하여 강도를 극대화한다. 이를 '담금질'이라 부른다. 우리 인생 역시 밋밋함을 벗어나 단단해지고 깊어지기 위해서는 극한의 스트레스와 파괴적인 하강 곡선이 필수적이다. 고통을 회피하려고만 버티면 그저 밍밍한 삶에 머무를 뿐이며, 유예된 고통은 결국 이자를 쳐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법칙은 위대한 인물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스티브 잡스는 서른 살에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났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이는 크나큰 충격이자 추락이었다. 그러나 훗날 스탠포드 대학 연설에서 잡스는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다"라고 고백했다. 비대해진 자아와 무거운 인프라가 강제로 소거되는 '인생의 오토파지' 시기를 겪었기에, 그는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으로 넥스트(NeXT)와 픽사(Pixar)를 창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발판 삼아 애플로 복귀해 오늘날의 아이폰을 탄생시켰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증명한 가장 완벽한 예시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 자신도 이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 삶을 '좀비 기업'처럼 굴리던 시기가 있었다. 타인이 보기에 그럴싸한 대학 간판, 장교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껍데기에 불과했을 뿐, 실제 시장에서는 어떠한 부가가치도 창출하지 못하는 '부실기업'과 다름없었다. 냉혹한 취업 시장에 던져졌을 때, 나는 철저하게 경쟁력 없는 나의 본질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그 방황과 추락의 시기가 내 삶에는 곧 경기 침체이자 창조적 파괴의 시간이었다. 과거의 유산을 벗어던지고 완벽한 제로 베이스에서 삶의 구조를 재설계하는, 삶의 '오토파지'를 실행한 것이다. 만약 그때 운이 좋아 어설프게 취업 문턱을 넘었다면 어땠을까. 당장의 단기적 손실은 피했겠지만, 빚으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처럼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서서히 부패해 갔을 것이다. 매몰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이 커진 40~50대에 회복 불가능한 끔찍한 추락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일찍 바닥을 치고 불필요한 것들을 태워버린 덕분에, 비로소 나아가야 할 명확한 경로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삶은 때때로 가시덤불 속에 진실을 숨겨두지 않나 싶다.
우리는 왜 커피, 초콜릿, 맥주 같은 '쓴맛'을 기꺼이 소비할까. 입에는 쓰지만 적당한 섭취가 몸에 이롭다는 것을 오랜 시간 본능적으로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쓴맛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맛의 구조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다른 맛들을 더욱 선명하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쓴맛이 거세된 커피와 초콜릿, 맥주를 상상해 보라. '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미식의 영역에서도 쓴맛이 필수적이듯, 우리의 인생에도 가끔은 쓴맛이 필요하다.
단기적인 추락이 두려워 현실과 평생 타협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바닥을 치고, 기존의 낡은 자아를 부숴야 한다. 인간의 단기적 편향을 지식과 통찰로 이겨내고 그 쓴맛을 온전히 견뎌낼 때, 비로소 인생은 더욱 깊고 단단한 풍미를 띠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