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대체 ‘우리’가 누구야?”
밥상머리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아빠의 얘기를 듣다 지친 언니가 괜히 나에게 눈을 흘겼다.
“나도 몰라. 그냥 밥이나 먹어.”
나는 피식 웃으며 먹던 밥을 재촉했다.
‘우리’는 아빠가 습관처럼 붙이는 말이었다. 이를 테면 어떤 주제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우리는 때려죽여도 안 그러지”, “우리는 어떻게든 다 해”처럼 본인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으로 둔갑시키는 이상한 습관이었다. 조직과 관련된 의견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까지, 아빠 뒤에는 항상 든든한 ‘우리’가 있었다.
35년간 근무하며 생긴 소속감이 만든 '우리'였을 것이다. 아빠가 속한 그 ‘우리’는 그야말로 못하는 게 없는 특수부대였다. ‘안되면 되게 하는' 용맹한 정신을 지녔고, 낮이건 밤이건 주중이건 주말이건 똘똘 뭉치는 전우들이었다. 조직을 위해 개인의 불편과 희생쯤 기꺼이 감수하는 그들이었다(실은 은행원이다).
아빠에게는 참 소중한 ‘우리’였을 것이다. 97년 금융위기 첫 합병, 06년 몸집 부풀리기를 위한 또 한 번의 합병. 수많은 명퇴자들이 생겼지만 아빠는 살아남았다. 사명이 두 번 바뀌고, 근무지가 네댓 번 바뀔 때도 아빠는 악착같이 자리를 지켰다. 아빠에게 ‘우리’는 어쩌면 못 만났을 뻔한 애틋한 ‘우리’고, 잘리지 않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귀한 ‘우리’였을 터였다.
끈끈한 '우리'의 의리는 개인사에도 이어졌다. 아빠가 현직에 있을 때 조부모님의 장례식은 조문객들로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빠는 절을 하도 많이 해서 양쪽 무릎이 생채기와 멍으로 뒤덮였다고 한다(그 시절에는 장례식장이 없어서 집에 제사상을 차리고 멍석을 깔아 조문객을 맞이 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나도 기억이 나는데, 아빠는 슬퍼할 새도 없이 동료들을 맞이했다.
지금은 경조사에도 참석 안 하는 철 지난 동료들. 큰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작고 쓸쓸해 보였던 아빠의 모습을 기억한다.
“퇴직하니까 사람들이 안 와.”
조문객이 별로 없어 아빠는 이미 정산 끝난 조의금을 자꾸만 세었다. 조직에 바친 세월만큼 실망도 컸을 것이다. 근데도 그 ‘우리’가 뭐 좋다고. 아빠가 답답하기만 했다.
은퇴 후 아빠는 재취업을 해서 서민 대출업무를 맡았다. 아빠를 만난 자영업자들은 저마다 횟집, 중국집, 말고기집을 낼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다. 대출만 해주면 그만이지, 아빠는 지금도 그 가게들을 찾는다(나도 몇 번 동행했는데, 기본적으로 맛이 있었다). 가게에 지분이라도 있는 양, 맛이며 인테리어며 꼼꼼히 피드백해주고 함께 고민하는 아빠. 그렇게 생긴 아빠의 '우리' 형님이 여럿 된다.
어쩌면 아빠에게 '우리'는 단순히 같이 일한 사람들이 아니라, 힘듦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상사에게 깨질 때 함께 술 마신 우리, 진급 누락됐을 때 같이 욕해준 우리, 동료들이 권고사직받을 때 진심으로 슬퍼해준 우리, 후배들한테 치일 때 마음 다잡아준 우리, 회사가 위기일 때 대동 단결한 우리, 누구에게도 말 못 한 개인 사정을 알고 말없이 일을 나눈 우리. 대출받아 인생 2막을 연 형님들에게 대뜸 ‘우리’ 소리를 붙인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제 회사 생활 5년 차가 된 나도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실은 나는 아빠의 그 ‘우리’ 소리가 참 싫었다(내 회사의 복지 수준을 폄하하며 얄궂게 쓰실 때는 아직도 싫다). 엄마를 핀잔할 때나 나와 형제들을 훈계하는 도구로 자주 쓰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는 아닌데, 왜 항상 ‘우리’ 타령을 할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보통 그 ‘우리’가 등장하기 전에,
“난 안 가, 당신이나 가서 도와줘요. 누가 보면 당신 일인 줄 알겠어.”
“아빠, 요즘에는 안 그래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큰일 남~”
등의 거절과 부정이 있었던 것도 같다. 아이러니하게 우리 가족과 아빠의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대척점에 있었다. 아빠에게 우리는 '우리'가 돼 주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유치하게 떠오르는 2000년대 유행 CM송.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