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Jan 11. 2024

사랑의 승자가 되면 후회가 없을까요

왕가위의 <동사서독>

1. 안녕을 말하는 것은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 

레이몬드 챈들러의 소설 속 유명한 문장이다. 프랑스식 표현이라 정확한 뉘앙스는 모르겠지만 추측해 본다. 이별을 고하는 것과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동등하다는 것일까.  

어릴 적 친구가 보내주었던 카세트테이프 B 사이드 첫곡에 녹음되어 있던 노래를 들어본다.


Ashes of Time Soundtrack Prelude - a lony heart

https://www.youtube.com/watch?v=r7yJFhe_NjQ&list=RDr7yJFhe_NjQ&start_radio=1


2. 모래바람을 지나쳐 여기까지 왔지


이별과 죽음 사이를 서성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거친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 가운데 있는 주막에 도착한다. 그리고 주막 주인 구양봉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한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지." 구양봉은 중얼거린다. 살인 청탁의 뒷면은 애정으로 얽혀있다. 다시 없을 설렘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랑은 지속되는 세월 속에서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알랭드보통에 따르면, 가끔은 서로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게 바로 진짜 러브스토리라고 했다. 죽음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또다른 일.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기억이라도 지울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어느 날 황약사라는 자가 '취생몽사'를 구해온다. 마시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술. 사발에 부어 잔을 들며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문을 걸듯 대답한다. 

파장이 이는 물결 위로 잊히지 못한 기억들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벽에 비친 새장의 창살이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마음을 가둔 채 휘리릭 흔들린다. 검을 쓰는 무사의 옷자락이 휘날리듯 잊으려 발버둥 쳐보지만, 그럴수록 기억만 선명해질 뿐이다.


3.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 최선의 선택은


영웅에게도 과거는 있다. 주막 주인 구양봉이야말로 연인을 떠나온 사람이었다. 훗날 황약사가 그녀를 찾아가 묻는다. 왜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그와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그녀는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더군요."

"때로는 말이 필요 없을 때도 있소"

"그래도 저는 듣고 싶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어이가 없는 한편 지나치게 이해가 된다. 듣고 싶은 한 마디를 해주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까. 그러고도 결혼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 남자는 정신 차려야 한다. 뭐라도 해야지, 그녀는 구양봉을 거절하고 형과 결혼했다. 이를 알게 된 구양봉은 함께 도망치자고 그녀를 이끌지만 소용없다. 그렇게 구양봉은 그녀를 떠났고 사막으로 떠밀려왔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어도 잊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구양봉에게 소유되지 않는 영원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서 사랑의 승자가 되었을까. 아직 대답이 끝나지 않았다.

"난 이겼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니 패자의 얼굴이 있었죠. 난 이미 지고 시작한 거였어요."


4. 고백과 농담 


시간을 돌이키고 싶다는 그녀의 말처럼, 만일 그때 구양봉이 사랑한다고 말했더라면 달라졌을까. 넋두리처럼 혼잣말처럼 그녀의 회한이 이어진다. 

"옛날에는 중요한 말이 있으면 꼭 말로 해야 영원하다고 생각했죠. 돌이켜보면 말하지 않아도 똑같아요. 모든 건 변하니까요"

구양봉에게 전해진 취생몽사는 그녀가 보낸 것이었다. 백타산을 오가던 황약사에게도 주막의 구양봉에게도 남겨진 그녀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시간 속에서 얼룩진 기억 혹은 지나온 세월을 향한 농담이었다.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안녕을 말하는 것이다. 지독하게 씁쓸한 농담이다.



*<동사서독>, <동사서독 리덕스> -왓차, 넷플릭스 시청 가능

**리덕스판보다 원래 <동사서독>이 더 좋은 듯 (개인 취향)











이전 02화 지상의 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