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의 <피크닉, 1996>
1. 까마귀 깃털처럼 흩날리던 불안
우리는 밤 12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헤치며 도착한 곳은 물고기 비늘이 첩첩이 그려진 간판이 있는 가게였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어묵탕을 후후 불어 마시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열을 올리다가 점점 영화 얘기로 흘렀다. 우리 네 명 모두 이와이 슌지를 좋아했다. <러브레터>보다는 언제나 그 영화였다.
멀리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던 총성이 식어가고 노을빛 아래 까마귀 깃털이 비처럼 쏟아지는 어떤 날. 그들의 세상에 종말이 왔다.
담장을 따라 이어지던 불안과 위태로움의 필연적인 결말이었을까. 그들은 스스로 종말의 방아쇠를 당겼다. 세상 어느 한 장소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 불안을 알 것 같았다. 우리도 다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와서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이상과 현실. 모순과 부조리. 본성과 허상. 현명한 어른이라면 그런 것들을 분별해야 한다고들 했다. 그런데 그런 어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발짝 내디딜수록 헛걸음인지 퇴보인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럴 때 눈부시고 찬란한 미래를 말하는 영화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드러나지 않게 잠재되어 있는 불안을 내 손으로 끝내는 장면을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그 영화는 기꺼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그날 우리는 가장 짙은 어둠 속에 만나서 불안의 심장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2. 경계를 넘어 한 발짝만 더
<피크닉>은 엔딩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였다. 오랫동안 그랬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에서 눈이 번쩍 떠진 것은 훨씬 그 이전이었다. 병원의 담장의 경계를 가뿐하게 넘던 그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 벼르던 탈옥수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워 기다려온 것도 아니었고,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담장을 뛰놀던 차라에게 한 발짝 너머 담쟁이로 덮인 담이 보였고, 친구들은 금지된 것이라며 말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담장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을 뿐이다.
그러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풍경이 드러났다. 경계를 넘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cBUYv46XFA
담장을 건너는 순간의 피아노 멜로디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다시 보니 이 영화의 베스트 씬은 엔딩이 아니라 그 순간이다. 그 한 걸음의 차이. 이와이 슌지의 연출력이 새삼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그런 것이었다. 무언가 기를 쓰고 노력해서 애쓰거나 추구하거나 한다고 해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움직이고 있다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 나비처럼 가볍고 산뜻하게 선을 넘을 준비가 되었는가.
자신을 억누르던 병원에서 바깥을 향해 뛰어넘은 한 발짝으로 다른 세상이 다가온다. 마을 사이 끝없이 뻗어있는 도로. 파도가 넘실대는 푸르른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담벼락을 따라 신나게 달려본다. 어디선가 강아지도 따라온다. 무엇이 다가올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일단 뛰어보자.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
3. 경계를 살아간다는 것, 죄와 벌
담장을 넘은 차라와 츠무찌처럼 극한으로 치닫는 삶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디엔가 굳건하게 자리 잡은 삶인지는 더 모르겠다.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 혹은 이방인이나 부랑자처럼 여기 지도 않지만, 종종 경계에 서 있는 듯한 혼란을 겪는다.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구분되는 것들. 무엇에 팔려서 그들은 비정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 병원에 강제로 들어오게 된 것인가. 환자의 소지품을 탐내고 내키는 대로 제압하는 그곳의 어떤 면이 정상인가. 모래에 얼굴을 파묻는 타조처럼 억지로 안 보이는 곳에 구겨 넣어 보이지 않기만 하면 세상에서 깨끗하게 지워지는가. 그런 일들은 영화에만 있는가.
재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죄를 지었다. 우발적으로 쌍둥이 동생을 죽였고, 성폭행하는 교사를 살해했다. 사람으로서 금지된 범죄를 저질렀지만, 이미 죄책감의 미망에 시달림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래서 어딘가 어긋나고 병이 들었고 충분히 아프다. 병든 것이 분명하지만 별로 아픈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확실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이 얻어서 들고 다니는 성경 속의 일화를 떠올린다. 간음하여 돌로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의 이야기가 있다. 당대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그녀를 데려와 예수를 시험한다. 법에는 돌로 치라했는데 어찌해야 마땅합니까. 죄인을 돌로 치라고 하면 용서의 정신에 위배되고,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이 모순 사이에서 놀라운 방법으로 정의와 용서가 동시에 지켜진다.
예수는 대답 대신 땅바닥에 손으로 글씨를 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그녀를 먼저 돌로 치라.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에게 내가 가진 어떤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알고 보면 같은 본질을 품고 있는데, 누군가에는 쉽게 낙인을 찍는다. 예수는 누구에게도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은 적이 없다. 비슷비슷한 인간끼리의 일이다. 구별 짓기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고 싶은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까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고을 뿐더러 흔히 잊고 살아가는 일이다.
4. 세상 끝의 구원을 찾아
담장 밑으로 떨어진 사토루는 피투성이가 된 채 뼈가 꺾이는 소리를 들으며 죽어간다. 온전하지 못한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차라와 츠무찌가 담장의 끝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불안은 최고조에 이른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위태로운 동행에서도 과연 얻은 것이 있을까.
차라와 츠무찌는 죄로 인한 고통을 이해한다. 아프기 때문에 상대의 상처를 볼 수 있다. 눈물과 비명으로 얼룩진 나날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안다. 스스로가 너그럽고 선하며 정상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불안을 모르는 사람들 말이다.
차라와 츠무찌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다가왔다. 그렇게 지구 최후의 구원을 향한 방아쇠를 당긴다.
피크닉(1996)은 드라마 영화로 방영되었다.
이후 몇 차례 재개봉되었고, 일부 스트리밍과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un1aNDtZ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