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자무시의 <지상의 밤>
1. 밤 그리고 수다
삶은 당신이 잠들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The life is something that happens when you can't get to sleep) -프란 레보비츠
프란 레보비츠를 인용하기엔 잠이 너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 있다. 자러 가기 아까운 시간. 자정이 지나고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 혹은 뱀파이어는 아닐지라도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도 스멀스멀 피어난다. 그 속을 서성대며 하릴없이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밤새도록 수다에 몰두했던 밤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밤공기 속으로 퍼져 흩어져버릴 시시콜콜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였음이 분명하다. 시간 낭비였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토록 하찮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술술 나눌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친구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
2. 밤공기와 택시, 도시의 조각배를 타고
지구는 둥글고 지상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밤이 찾아온다. 자오선에 따라 그림자의 움직임은 달라져도 끊임없이 순환하고 반복되는 밤. 불빛 총총한 도시를 가로지르는 가장 좁고도 어두운 세상, 밤의 조각배 택시가 도로를 달린다. 달리는 속도를 따라 번져가는 불빛들이 선을 그리며 따라온다. 창문을 조금 열어본다. 한겨울의 밤공기가 택시 안의 노곤한 기운을 깨운다.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깨어있었던 때가 없었어"라고 고백하며 벼랑 끝으로 차를 몰던 델마와 루이스를 잠깐 떠올리는 순간, 누군가 끼어든다.
Night on Earth.
https://www.youtube.com/watch?v=AVfY4eODIeY
3. 헬맷과 요요의 조금 이상한 드라이브
찬바람 부는 한겨울 뉴욕의 밤거리. 택시가 잡히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경험이 있다면 눈길을 줄만한 한 사람이 있다. 도로에 나선 양치기라도 된 듯 양쪽 귀에 날개 달린 털모자에 농구화 차림의 흑인. 택시비는 충분하다는 듯 현금까지 꺼내어 보이지만, 택시들은 좀처럼 낚이지 않는다. 어렵게 멈춰 선 택시 앞에 행선지를 밝혔지만 '브루클린'이라는 말에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쏜살같이 달아난다. 브루클린으로 가려는 택시도 드물겠지만, 택시가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내빼는 택시들을 보며 투덜거린다. '뭐야, 투명인간(an invisible man)이라도 된 건가. ' 지나가는 푸념처럼 내뱉었지만 인종차별이 특별할 것 없는 시절이다.
이때 한 낡은 택시가 털털거리며 멈추어 선다. 도시에 찌들지 않은 선한 눈망울로 서툰 영어를 구사하는 그는 동독의 이민자다. 이렇게 해서 택시는 탔지만, 산 너머 산이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뉴욕 택시의 기어 변속에 익숙하지 못한 그 택시는 그 자리를 좌불안석으로 만든다. 그 덜커덩거림을 도저히 못 견딘 승객이 내리겠다고 하자, 드라이버는 해맑은 눈빛으로 애원한다. "당신은 나의 최고의 승객이에요."
욕을 달고 살기는 하지만, 진짜 모질지는 못한 그는 결국 거래를 제안한다. 자리를 바꾸자. 뉴욕의 길도 잘 알고 운전도 익숙한 그가 드라이버가 되고 독일인 드라이버는 승객으로 가는 것. 독일인은 놀라서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그는 답한다. "여기는 뉴욕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비슷한 털모자를 쓴 두 사람이 택시에 나란히 앉게 된다. 그 모습만 봐도 웃음이 난다. 독일인의 이름은 핼무트, 흑인의 이름은 요요지만 요요는 핼무트를 내키는 대로 헬맷이라 부른다. 두 사람 모두 이 도시에서 이방인인 셈이다. 헬맷과 요요의 이 이상한 탑승으로 시답지 않고 사소로운 수다들이 밤의 택시를 가득 채운 채로 뉴욕의 밤거리를 내달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특별한 사건도 없다. 다만, 길가에서 밤거리를 쏘다니는 요요의 여동생을 우연히 발견한다. 요요는 밤길 다니는 동생을 나무라며 강제로 택시에 태우고 이제부터는 오빠와 여동생의 입씨름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동생은 오빠와 같은 모자를 쓴 헬맷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웃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웃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말다툼으로 이어지지만, 가족 없이 이 도시에 떨어진 헬맷에게는 가족의 말다툼조차 부러운 장면이다. 쉴 새 없이 다투는 남매를 보며 그는 웃으며 중얼거린다. "좋은 가족이야!"
우리는 잊고 있다. 홈드라마에서처럼 밥상에 둘러앉아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시간만이 가족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때로 지겹고 지난하게 마주하게 되는 투덜거림과 삐걱거림 역시 가족의 시간이라는 것을.
4. 꽁꽁 얼어붙은 깜깜한 밤, 반짝이는 순간을 찾아
짐 자무쉬의 '지상의 밤(Night on Earth,1991)'은 좋아하는 영화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얼어붙도록 춥고 깜깜한 밤이면 꼭 떠오르는 영화이다. 오늘도 파리, LA, 뉴욕, 헬싱키, 로마. 혹은, 아직 보이지 않는 도시의 시계들이 여전히 째깍거리고 밤을 재촉하고 별다를 것 없는 사람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거창한 사건이나 드라마가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위대하고 훌륭하고 멋진 사람들만 세상의 주인공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결핍이 있는 이에게도 쓸쓸한 이에게도 이야기는 있고 우연을 가장하여 멋진 순간이 찾아온다. 그 일상적인 순간의 경이로움과 위트를 발견하는 감추어진 초능력. 짐 자무쉬는 그걸 깨우는 사람이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사람이 조금씩 더 좋아진다. 걸걸한 탐 웨이츠의 노래가 오늘도 지상의 밤을 깨운다.
Tom Waits - Back in the good old world
https://www.youtube.com/watch?v=3xE37ZXjeBo
*<지상의 밤, 1991>을 볼 수 있는 스트리밍 - 티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