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Jan 25. 2024

뻔하지 않은 사람들을 좋아하세요?

코엔형제의 <더 브레이브>


1. 어딘가 좀 이상한 소녀, 매티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 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에스겔 37:2


시체들이 있는 방에서 숙박을 자처하는 소녀가 있다. 열네 살의 매티는 아버지의 장례 비용을 협상하면서 시체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에스겔이 되어 뼈무더기 골짜기에 있는 것 같았죠."

소녀에게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의 의지만큼은 하늘을 찌른다. 

매티는 과감하게도 현상금을 걸고 보안관을 고용한다. 쫓아가는데 탁월한 자와 사악하지만 술주정꾼, 온정이 있어 범인을 생포해 오는 자. 그들 중 누구를 택할 것인가. 사악함은 어쩐지 복수와 어울린다. 매티에게는 오직 하나의 뚜렷한 목표만 있을 뿐이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 있다. 매티가 노크하고 있는 곳은 보안관 루스터가 한창 일을 보고 있는 변소. 뒷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서부시대 '변소'다. 비즈니스로 찾아왔다는 말에 지금 내 용무가 더 바쁘다는 루스터. 매티는 물러서지 않는다. "근데 용무가 기네요." 

적당히 거절해도 끝까지 기를 쓰고 쫓아오는 복수심을 사악한 보안관인들 말릴 수가 없다. 매티는 튼튼한 검은 말 '리틀블래키'도 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코트를 걸치며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권총은 이미 준비해 두었다.


2. 제대로 묻히고 싶다면, 여름에 죽든가


장례의 슬픔에 갇혀있는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 어른들과 협상하며 복수에 나선 소녀 매티도 전형적인 소녀들과 거리가 멀지만, 술에 절어 살면서 현상금을 쫓아 일하는 백전노장 보안관 루스터 역시 뻔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 보이는 그가 정말 일이나 제대로 해낼까? 비틀거리는 발걸음, 걸걸한 목소리, 허술해 보이는 차림새. 매티와 약속도 어기고 먼저 출발한 루스터는 이미 일행과 강을 한참 건넜다. 리틀블랙키와 함께 추격에 나선 매티는 추운 겨울에도 말을 타고 허우적대며 강을 건넌다. 루스터의 동행 텍사스 레인저 라뷔프는 철없다며 매티를 붙들고 엉덩이를 마구 매질한다.(이토록 완벽한 아이 취급에 웃음이 난다) 

때리는 어른, 맞는 아이, 구경하는 노장. 이 상황 속에서 맞고 있던 매티가 한 마디 던진다. 

"그냥 보고만 있을 거예요?"  

구경하던 노장은 제대로 알아듣는다. 허공에 총알을 날려 상황 종료. 소녀와 노장 보안관의 연대 선언이자, 우정의 예고편 같은 총성이다.

그렇게 복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쫓는 복수를 향한 여정은 나뒹구는 시체, 칼부림, 총성, 폭행이 뒤범벅된 난장판이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사악한 술주정꾼 루스터의 진가가 드러난다. 눈동자보다 빠른 손. 허술해보이만 결정적 순간에 정확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코엔 영화에 종종 보이는 캐릭터이다. 겨울 꽝꽝 얼어버린 땅에 묻히질 못하는 시체를 염려하는 매티의 말을 되받는 한 마디가 그가 지나온 세월을 증명한다.

"제대로 묻히고 싶다면, 여름에 죽던가."


3. 대지의 수평선을 가로질러 


온갖 험한 일들을 거쳐서 매티는 드디어 원수 채니와 맞닥뜨린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루스터와 떨어져 있었고 혼자였지만 소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복수를 선언하며 거침없이 총알을 날리고 쫒고 쫓기다가 함정에 빠져 독사에 물린다. 

독이 퍼져나간다. 이제 시간이 없다. 루스터는 소녀를 말에 올리고 황량한 대지를 달린다. 시체도 널려있고 사람 하나 없는 삭막한 길에도 노을이 지고 별빛이 찾아든다. 인간사의 희로애락, 거친 복수가 들끓는 세상에도 자연의 섭리는 한결같다. 거친 숨소리가 들릴듯한 이 장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워졌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이렇게 정직한 방식으로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니!) 

https://www.youtube.com/watch?v=ftiow7fkW6A

겉으로 봐선 알 수 없다. 헌신이 무엇인지 아는 인생의 빛은 이럴 때 드러난다. 우스꽝스러운 내복을 입고 있어도 바래질 수 없는 것. 현상금을 쫓는 사악한 술주정꾼의 웅얼거림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제목이 뜻하는 용기는 어떤 것일까. 소녀가 보여준 용기에 대한 노장 보안관 루스터의 대답이다. 그는 있는 힘껏 말을 몰아 매티를 구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두 사람 뒤로 시간이 날아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끼던 말 리틀블랙키도 쓰러졌다. 루스터는 매티를 안아서 힘겨운 두 발로 달린다.

마침내 멀리 어느 집의 작은 불빛이 보일 때, 그제야 루스터는 털썩 주저앉는다.


4. 시간은 자꾸만 달아난다.


루스터가 중얼거리던 말이 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지. 신의 은총만 제외한다면"

(You must pay for everything in this world one way and another. There is nothing free except the Grace of God.)


복수는 이루었지만 매티는 팔을 잃었다. 그 이후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인연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삶에서 더없이 큰 의미가 된다.

잘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서도 기꺼이 나아갔던 소녀의 용기는 루스터에게도, 라뷔프에게도 전염되었다. 잠들어있던 그들의 용기를 깨웠다.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해도 그 시절에 불러일으킨 용기는 각자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고 온기를 주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 고결한 사명을 발견하고 평생 잊지 못할 사람으로 남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 헌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그 사이에 헌신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제대로 만나기만 한다면 함부로 억지로 명령할 수 없고 섭리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 우리에게 그런 자리가 있었던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시간은 자꾸만 달아난다. (Time just gets away from us)



더 브레이브(True Grit, 2010), 티빙에서 시청 가능 


이전 06화 같이 웃고 떠들던 우리는 친구였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