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Feb 22. 2024

너무 인간다운 질문이군요

코고나다의 <애프터 양>


1. 내가 되고 싶은 건


그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 서로 가자고 말하는 고고와 디디는 몸을 틀지만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막이 내린다.


돌아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어릴 때에도 아득하게 감지되는 세계가 있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배우지만, 학교라는 그 좁은 틀 안에서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미성년자'라는 딱지로 보호 대상인 듯 불렸지만, 세상의 악덕은 성인이 되어야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따돌림, 폭력, 혐오, 비난, 가식, 위선. 유년시절에도 얼마든지 가까이 있었다. 영악한 아이들은 피해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한 대 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방법을 익혔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다만

손이 닿을 곳에 음악이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0x0-TBxUbw

I wanna be just like a melody
just like a simple sound

-Glide,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에서


혼자 릴리슈슈의 노래를 듣는 푸른 들판이 피난처가 된다. 유이치가 폭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이다. 

음악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것일까. 같은 노래를 기억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이 있다.


2. 인생에서 3초의 기억만 담을 수 있다면


미래 시대에도 4인가족이 이상적일까. 각자의 일로 바쁜 부부 제이크와 카이라는 하나뿐인 딸을 돌봐줄 오빠로 '안드로이드 로봇'인 양을 구입했다. 여느 때처럼 온라인 4인가족 댄스 경연에 참가하며 즐거워하지만, 이상하다. 게임이 끝났는데 양의 춤이 멈추지 않는다. 프로그램에 이상이 온 것인가, 수명이 다 한 것인가.

고장 나버린 오빠로 인해 미카의 일상도 어긋나고, 어떻게든 고치기 위해 부부는 동분서주하지만 정품 아닌 리퍼로 구매한 것이다 보니 수리 방법이 단순하지 않다.

제이크는 양의 부품 중 기억장치를 손에 넣는다. 안드로이드 양의 기억장치에 접근하는 과정이 하나의 우주처럼 펼쳐진다. 안드로이드는 기억을 3초만 선택하여 저장할 있다. 제이카는 신경세포로 엮인 스냅처럼 끝도 없이 펼쳐져있는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양을 새롭게 발견한다. 이제까지 로봇으로 제품으로 그를 대해왔다. 하지만 로봇의 '죽음' 이후에야, 또 그의 기억 속으로 찾아가면서 양을 사람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이 알지 못한 사실도 있었다. 안드로이드 양의 삶은 제이크 가족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왔다. 사람의 수명대로 따진다면 아들이 아니라, 할아버지 그 이상인 셈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뱀파이어처럼 그는 젊은이의 외양으로 제이크가 짐작조차 못할 몇 번의 생을 살아온 것이다.


아침 바람으로 흔들리는 풍경소리,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빗소리,

밖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테이블 위 말라비틀어진 귤껍질 조각들.


제한된 기억만 저장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의 저장소를 채우고 있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상이었다. 그는 차를 마실 수는 없었지만 인간보다 차를 알고 싶어 했다. 제이크는 가루로 된 차를 마시지만, 잎차에서 차의 본질을 찾아내어 동생에게 정확히 알려주고 싶어 했던 것은 안드로이드 양이었다. 눅눅한 나뭇잎과 숲 속 풀향을 느린 걸음으로 지나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헌신'이라는 미덕은 사람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었다. 양은 제이크도 경험하지 못한 세월을 겪어오면서 학습한 모든 것들을 미카에게 쏟는 데 헌신했다. 안드로이드는 부모가 바빠서 딸을 돌보지 못하는 시간을 촘촘히 메우고 있었다. 사람의 유한한 시간으로 다 할 수 없는 정성을 안드로이드가 동생에게 쏟고 있었다. 온전히 인간을 돕기 위한 프로그래밍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3. 인간의 흔하고도 뻔한 착각


우주와 같은 양의 기억 속에 그 노래가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양은 릴리슈슈의 티셔츠를 입고 그 음악을 듣고 있다.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그 노래에서 양은 무엇을 듣고 있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cIJ8-HGWlKw

그 노래의 기억을 쫓아가면 안드로이드 여자친구 에이다가 있었다. 제이크는 그녀를 만나 양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을 대신한다.  

"양이 테크노인걸 힘들어했나요?"

정적. 에이다의 얕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

"너무 인간다운 질문이지 않아요?

다른 존재는 모두 인간을 동경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We always assume that other beings would want to be human. What's so great about being human?)


또 다른 기억의 우주에는 카이라가 찾아온 양의 저녁 시간이 있다. 양은 19세기 중국인의 흔적을 따라 나비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는 학습된 지식 한 조각을 내놓는다. 

애벌레에게는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다
- 노자

카이라는 감탄하며 끝과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안드로이드의 솔직한 답을 듣고 싶어 한다. 과연 다른 생명에게도 그 뜻이 통할까. 안드로이드인 너는 어떠냐고 묻는다. 


"전 끝에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요. 

Nothing이 있어야 Something이 있는 거니까요."

태생만으로도 스스로를 something이라고 확신하는 인간. 기꺼이 Nothhing이어도 미련을 두지 않는 안드로이드. 어느 쪽이 진짜일까. 

양의 기억 속 우주는 점점 깊어져가고, 다 알 수 있다는 사람의 오만은 변하지 않는다. 


4. 노래는 계속된다.


이렇게 양은 수명이 다 한 후에 남겨진 메모리로 가족에게 새롭게 창조된다. 제이크 부부는 이대로 양을 테크노박물관에 보내는 것이 탐탁지 않다. 누구보다도 양의 부재로 큰 상실을 겪는 것은 동생 미카이다. 

미카는 오빠가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부른다. 양이 즐기던 릴리슈슈의 그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P1IwT4GpovU

Mitsky - Glide


이제 양은 세상에 없지만 비 내린 후 습한 기운으로 가득 찬 숲에서 눅눅한 잎사귀를 밟으며 걷는 제이크에게 찻잎을 말하던 그 기억으로 다가온다.

"당신을 찾았잖아!"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카프카의 문장은 그렇게 살아난다.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은 왓챠에서 볼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