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Feb 19. 2024

대답하지 마, 두려우니까

웨스앤더슨의 <로열 테넌바음>

1. 'Hey, Jude'의 시작


슬픔을 위로하는 마음이 노래가 된다. 비틀스의 '헤이 주드'는 부모의 이혼을 겪는 아이를 위한 노래다. 폴매카트니는 이혼하는 존레넌의 아들 줄리안을 보며 이 노래를 썼다. 슬픈 노래지만 더 좋게 만들어보자. 아이를 다독이던 그 멜로디는 시대를 넘어 모두의 송가가 되었다.

영화의 시작은 가정의 불화를 암시한다. 어디서부터 인지 알 수 없지만 어긋나고 있는 균열의 서막은 그 노래로부터 전해진다. 이 어긋남을 부디 잘 견뎌낼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H6l9lUPILgg&t=14s

동화 같은 깃발이 휘날리는 아처 애비뉴의 어느 벽돌집. 창마다 번지는 오렌지빛 속으로 따뜻한 가족의 풍경을 기대해 보지만, 테넌바움 가족의 대화는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아버지는 나름 노력 중이다. 아이들에게 떠나는 이유를 설득하려 하지만, 아무리 잘 설명한들 이해하게 될까.

"엄마가 뭣 때문에 이혼하쟤?" 

"사실, 나도 짐작은 안 가"

어이 없지만 솔직하다. 그런데, 어른이고 가장이 되면 책임의 무게는 커져간다.


 2. 천재 로열패밀리에게 없는 딱 한 가지


아버지 로열 테넌바움은 잘 나가는 변호사였지만,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가고 자격도 상실된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이유를 짐작이 안 간다고 했지만, 짐작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을 떠난 뒤, 가족은 나 몰라라 하며 쭉 호텔에 산다. 이렇게 신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왜 가정을 꾸렸을까 싶은 경우를 종종 본다. 하지만,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널렸다. 안타깝게도 인생의 비극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에 있다. 

고고학자인 엄마 애슐리는 아버지의 빈 틈을 메우려는 듯 아이들 교육에 매진한다. 엄격한 스케줄 관리와 전폭적인 투자로 테넌바움 가의 삼 남매는 일찍부터 천재의 기질을 발휘한다.

아버지와 경쟁해도 밀리지 않는 어린 금융천재 제스, 9살에 이미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난 마고, 독수리를 친구로 삼은 범상치 않은 테니스왕자 리치. 그리고 가족인듯 아닌 듯 앞집 사는 이웃이지만 제 집처럼 드나드는 엘리까지.


웃음기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집이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그 집에 살면 고통의 기억을 망각으로 바꾸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턴테이블 위로 음반을 올려놓고 혼자 음악 들을 수 있는 작은 텐트, 소방 훈련 부럽지 않게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는 계단과 복도, 도시가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옥상 위 작은 다락에서 날아오는 독수리를 바라보는 일상. 

가장 흥미로운 건 스모키 화장을 즐기는 마고가 죽치고 있는 욕실이다. 작은 선풍기를 옆에 끼고 페디큐어를 하며 한 손에는 담배. 누군가 노크를 하면 발가락으로 문고리를 열어주는 포스를 갖춘 그녀. 미니 TV를 가져와 묶어둔 채 여섯 시간 내리 욕조에 누워 TV를 보며 어쩌면 자신의 삶을 구상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무토막으로 덧붙인 인공 손가락을 툭툭 두들기는 동작은 이 세상 텐션이 아니다. 입양되었다는 출생의 비밀까지 그는 어떤 면에서 신비로움의 모든 것을 갖추었다.


3.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아버지의 돌봄 없이도 그럭저럭 굴러가던 테넌바움 가족에게도 세월은 찾아온다. 한때 반짝이던 것들이 빛을 잃어간다. 모두가 천재였던 그 시절은 과거가 되었다. 테니스왕자는 최악의 경기를 끝으로 코트를 떠났고, 작가는 공백기가 길어진다. 금융천재는 아내를 잃은 비행기 사고 이후 안전에 대한 강박의 세상을 살고 있다. 

엄마 애슐리는 재혼 프러포즈를 받고 고민 중이다. 연락 두절이었던 남편이지만, 차마 그 꼴은 볼 수가 없다. 로열은 가족에게 돌아갈 구실을 찾는다. 어설픈 시한부 인생을 가장하여 누구도 초대하지 않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강력한 거부반응을 거쳐 '소 닭 보듯'하는 일상이 펼쳐진다. 무슨 망조가 들어서 아버지가 돌아온 걸까. 실은 관심도 귀찮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면서요?" 손주들이 묻자, 아빠의 대답. "아니, 지금 돌아가시는 중이야."

"당신,... 그래서 죽어요, 안 죽어요?" 아내가 묻는다. 차라리 진짜 시한부여야 하는 것일까.

"그 남자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딸 마고에게 새아빠를 경계하라고 외친다 한들.

"아버지가 아니긴 당신도 마찬가지." 차라리 말을 걸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우리가 서로 모른다는 게 안타깝구나."

온갖 박대 속에서도 로열은 손주들을 꼬신다. '안전 최우선 세상'이라는 아버지의 트라우마에 갇힌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악당처럼 손주들을 이끄는 철부지 할아버지의 일탈이 후련한 이유는 무엇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Q5Hbs0s6_sQ

뒤늦게 가족으로 살아보려는 처절한 로열의 몸부림을 보며 아내 애슐리가 묻는다. 요즘 어떤 지를.

"매일매일 싸움 또 싸움의 연속이지." 

제 멋대로 내키는 대로, 남들 보기에 돼먹지 않은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그라고 해서 세상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는 그 한 가지를 알고 있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그 순간순간을 사랑해."    


4. 대답하지 않아도 돼, 두려우니까.


애초에 시한부 인생을 선언했을 때부터 가족들의 반응은 그랬다. 아무리 봐도 아픈 거 같지 않아요. 고맙다며 얼버무렸지만 오래가지 못할 게임이었다. 거짓임이 들통나고 짐을 꾸려야 하는 결말. 다시 쫓겨나는 로열.

그가 내몰리며 택시를 기다린다. 가족들에게 했던 과거에 비하면 불공평하게 시시한 결말일까. 그 순간 꼭 필요한 고통을 로열의 영원한 동료 파고다가 선사한다. 슬픔에 가라앉지 않게 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그 재치와 발상이 놀랍고 웃음이 난다.(이런 센스야말로 웨스앤더슨 영화세계의 오리지널리티다. 강박적 미장센못지않은)  


이제 억지로 메꿔왔던 그 틈이 벌어진다. 비밀스러운 마고의 사생활이 밝혀지고, 그 결과 이제껏 숨겨왔던 리치를 강타한다. 누구도 말하지 않던 진실이 폭로된다. 타인의 삶은 비밀이다. 가족 역시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49DcEoeSec&t=9s

로열은 자신이 살던 호텔 엘리베이터맨으로 취직한다. 돈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실은 존경받고 싶다. 그 누구보다도 가족들에게.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조언을 구하러 찾아온 아들 리치에게 함부로 답하기를 포기하지만, 손주들이 좋아하는 강아지를 선물할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면서도 쉽게 내뱉지 못하는 그 말을 하기까지가 이렇게나 먼 길이다.

"사랑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두려우니까."  

  


<로열 테넌바움 Royal Tenenbaums, 2001>은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전 13화 그가 천재였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