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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Apr 29. 2024

아이스, 데스, 아메리카노 & 연필

학교 운동장 위로 날아오르던 비행기를 떠올렸다.


멀게만 보이던 비행기가 지금은 코앞에 다가와 있다. 탑승 수속을 마친 수지와 함께 활주로가 보이는 대합실에 앉아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레모네이드를 하나씩 손에 들고 나란히 앉아, 떠날 채비를 하는 비행기를 커다란 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옅은 조명이 드리운 활주로에는 기지개를 켜는 비행기들 사이 정비사들이 걸리버 왕국의 소인들처럼 움직인다.


"우주에서도 그대로 쓸 수 있는 게 뭔 줄 알아?" 수지는 얼음을 흔들며 말을 꺼냈다.

"글쎄... 모르겠고, 화성에 얼음이 있다던데 그걸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만들어 먹으면!" 나는 오독오독 얼음을 씹으며 대꾸했다.

"아! 아이스, 데쓰, 아메리카노. 어떤 외국인이 그렇게 주문하던데 " 수지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뭐?" 나는 수지를 뻔히 본다.

"얼. 죽. 아 말이야. 근데 왠지 그럴듯하지 않아? 얼쓰 윈드 앤 파이어란 밴드 있잖아. 어감이 딱 그 느낌?"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에 웃는다.


"... 우주에서도 연필을 쓸 수가 있대" 수지의 얘기는 드디어 연필로 돌아왔다.

"다른 펜은 안 되나?"

"볼펜 같은 건 잉크가 기압이나 중력이 작용해야 나오는 거니까 우주에선 소용이 없대. 오히려 단순하게 연필 같은 건 쓸 수 있다는 거지."

"오호 그렇겠네. 영화에서 러시아 우주인들 연필 얘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뭐, 이론은 그렇대. 실제로는 우주에선 흑연이 날려서 안 될 수도 있지만."

"설마... 그것 때문에 연필을 좋아하는 거야?"

활주로에서는 수신호가 오간다. 버스 운전사들끼리의 손 흔드는 인사를 보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파일럿과 유도원의 수신호가 오갈 때도 그렇다. 어둠 속에서도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날아오르기 전의 긴장감과 설렘이 공기를 가로지른다.


"우리 아빠는 택시운전을 하셨는데, 남는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직업으로 택하셨대. 교대 시간이 되어서 집에 오면 책을 펼쳐서 연필로 그으면서 읽곤 하셨어. 여름이면 창가에서 매미 소리가 들리는 사이 책장이 넘어가면서 사사삭 그 소리가 듣기 좋았는데..."


수지의 아버지는 1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신 줄은 알았지만 그 얘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연필을 잡으면 아빠 생각이 나. 나도 금수저여서 엄청난 상속을 받고 그랬으면 어떨까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냥 그 연필 소리가 아빠가 남긴 아주 큰 유산 같아."


근사한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언가 말하는 대신 우리 사이의 침묵을 듣고 있었다.

수지는 연필 드로잉을 좋아한다. 회화 전공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미술사학을 택했다. 우리가 그때 열광하던 책은 '문학과 사회의 예술사'였고 그는 저자의 모국을 꼭 가보고 싶어 했다.


"그때 연필을 깎았던 건... 그 노래 알아? My Favorite Things? "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그 노래?"

 "맞아, 그 노랫말이 그렇잖아. 슬플 때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려서 기분이 나아지게 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귓가에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나한텐 그런 거야. 연필을 깎는 것이 어떤 의식처럼... 침울해질 때 처방제 같은 것."


Leslie Odom jr. -My Favorite Things

https://www.youtube.com/watch?v=8Gx6abDwM5g


"그 노래처럼 '페이버릿 씽스'를 가득 채워서 함정에서 탈출할 거야." 얼음을 가르는 듯한 단호함이 전해졌다.

"일단... 연필, 레모네이드, 그리고 얼죽아 추가" 나는 노랫말을 잇듯이 덧붙였다.

고교 시절의 절망을 떠올렸다. 모두가 한창 때라고 좋은 나이라고 했지만 언제 그렇게 바라는 것들이 내 손에 잡히는지 궁금했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하기엔 이미 이 세계의 매트릭스가 견고하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 어른거리던 시절이었다.

"너는 그런 거 없어? 너의 페이보릿 씽스? 수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수지를 태운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창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비행기를 바라본다. 동이 터오는 먼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간다. 늘 말하던 구름의 방향이다. 그가 다시 돌아올 즈음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땅에 떨어질 것인가를 떠올려보았다.


"걸어가는 것?" 그때 나는 그렇게 답했다.

계속 걸을 수만 있다면, 문제를 없앨 수는 없어도 작게 다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발밑이 푹신하게, 발걸음이 사뿐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나를 둘러싼 함정에 머물지 않도록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방식이었다.

멀리 수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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