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합격자의 스펙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 과친구를 따라 어느 기업의 채용설명회에 와 보았다. 참석만 해도 가산점이라는 말로 잡아끌었다. 평소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애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멀끔한 수트 차림의 담당자는 미소를 띤 표정으로 프레젠테이션했다. 하얀 셔츠가 눈처럼 빛났고 심플한 타이는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그 어떤 수업시간 보다 집중된 분위기였고, 정보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태블릿을 두들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작년 합격자의 스펙은 빈 틈 없이 채워져 있었다. 해외 인턴 경험, 봉사활동, 취득한 자격증들, 그리고 4개 국어까지.
설명회를 마치고 나오는 손마다 기념품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키링이었다. 인파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제법 직장인처럼 차려입은 과친구 현수였다. 이 회사 인턴으로 이미 수시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났다. 우리는 잠깐 멈추어 섰다.
"이진, 요즘 어때?"
"... 시간은 빨리 가네. 너야말로 어때?"
"아, 아직 인턴이라... 좀 유령 같긴 한데, 오늘 책임님 따라온 거야. 너, 기념품 챙겼지?"
나는 훤칠하고 유창하게 설명하던 담당자를 떠올리며 키링을 흔들어 보였다.
"유령?"
"너무 과도하게 나서면 방해되고, 그렇다고 가만히만 있음 정규직 되겠어? 유령처럼 있다가 필요할 때 알지? 알잘딱깔센!"
현수는 멀리 보이는 담당자를 살피더니, 손 흔들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꽤 눈치 빠른 유령처럼 보였다. 학기 내내 장학금 타며 스펙 관리한 현수를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자기 말대로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일할 것이다. 손가락 사이 달랑거리는 키링을 흔들며 교정을 나왔다.
손끝의 액세서리, 이 회사와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설명회를 몰랐을 때보다 어째 더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눈치 빠른 유령은 마늘을 먹고 인내해서 몇 달 후 사람이 되겠지만, 유령도 못 된 나는 어찌 되는 것일까.
이디스의 톡이 와 있었다.
'오늘 저녁 8시. 클럽 팜. 오케이? 친구의 공연이 있어.'
내가 막차를 차던 그날, 이디스는 다른 공연장에 있었다. 같이 공연을 보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업 채용설명회와 클럽공연장. 완전한 이질적인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있잖아, 이디스. 회사에서 일해본 적 있어?"
"그럼, 나 수트도 꽤 어울린다? 난 꼭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진 않아. "
"근데 왜 지금은?"
"음... 그건 내 맘대로 안 되는 거 같아. 일이라는 건 원래 생계를 위한 거잖아. 집세도 낼 수 있고, 친구나 가족에게 뭔가를 사줄 수 있고 그걸로도 좋잖아.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하고 집세도 내고 밥값도 낸다? 그런 행운이 그렇게 쉽게 주어질까?" 나는 이디스의 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디스, 그렇게 똑 떨어지는 사람이었어?"
이디스는 크게 웃었다.
"지나친 환상은 언젠가는 깨져. 좋아하는 일을 진짜 좋아하는지도 해 봐야 아는 거라고!"
"그나마 환상마저 없으면 사람이 뭘로 살아?"
"환상은 필요한 거지만... 어떤 환상은 사람을 망쳐." 나는 슬쩍 이디스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우리는 클럽 앞에 도착했다. 어스름한 조명이 있는 재즈 클럽이었다. 입구에는 오늘의 공연 리스트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깊숙이 들어가 있는 무대 가까이 자리 잡았다. 순서를 기다리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유령과 사람 사이를 떠올려보았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를 보니 깊은 울림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 허락된 세계는 어떤 곳일까. 스르르 눈을 감아본다.
다만, 나는 미지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Chalie Haden - En La orilla Delmondo
https://www.youtube.com/watch?v=Fg6KBIhej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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