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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May 09. 2024

서울의 조식은 김치찌개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김치찌개가 끓고 있다. 


얼큰한 찌개 냄새가 코끝까지 퍼져온다. 간단한 밑반찬들과 두툼해서 폭신해 보이는 계란말이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아침 11시의 식당은 꽤 여유롭다.


예스러운 궁서체 간판에 여기저기 기스가 난 낡은 테이블이 다섯 개 있는 노포집.

뉴욕에서 왔다는 이디스는 어떻게 토박이들만 알 것 같은 이런 식당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라면 사리를 찌개에 넣는 중이다. 


"이 김치찌개집 자주 와요?" 나는 국자로 찌개를 휘휘 저으며 물었다. 

"한국 오면 꼭 먹고 싶었어. 김치찌개에 계란말이... 어렸을 때 할머니 따라서 왔었어요." 궁금한 건 많은 데 무슨 질문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사이 이디스가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이민 가게 된 건 열 살 때였어요. 아버지가 주재원이어서... 뉴욕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고 쭉 살았죠."

"그럼... 할머니를 만나러 온 거예요?"

이디스는 국자로 찌개를 떠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한 입 떠먹었다. 진한 육수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나는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나누어 잘랐다. 


"할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어. 난 그냥 옛날 집에 가보고 싶었던 건데..." 

나는 폐허의 응접실에 있던 장면을 떠올렸다. 이디스는 오늘도 블랙 원피스였다. 같은 옷은 아니었지만, 블랙이 무슨 시그니처라도 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 재개발 동네에 할머니집이 있었던 거죠?"

"재개발?" 

"오래된 집들을 허물고 다시 새 집을 짓는 거요" 

"할머니 집 마당에서 여름이면 호스를 연결해서 물장난을 치곤 했어요. 발아래 돌바닥에 물이 찰랑거리는 걸 좋아했는데... 할아버지가 만든 나무 그늘 아래 등나무의자에서 낮잠도 잤어요. 할아버지는 손바닥에 늘 호두 알을 쥐었다 폈다 했는데, 그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죠."

"유년시절 추억의 장소였군요"

"하루는 옆집이 비어서 그곳에서 사촌언니와 밤새워 만화책을 보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섭지도 않았나 싶지만... 그 집이 이사 나가고 아무것도 없던 그 적막이 좋았어요. 왠지 귀신 나올 거 같이 으스스하고..."

"음, 두 소녀의 모험이네요. 한 밤의 빈집... 난 모기향 냄새를 좋아해요" 갑자기 나에게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모기향?" 이디스의 눈동자가 커진다.

 "여름방학에 할머니집에 놀러 갔을 때 밤에는 모기향을 피워두었거든요.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곤 했었는데 그때의 기억에 모기향이 묻어있어요. 풀벌레 소리를 따라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저기 먼 땅끝까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이어져 있을 것 같았거든요."


어느새 밥 한 공기가 비워졌다. 주인아주머니는 투박한 그릇에 숭늉을 담아 내오셨다.  후후 불며 숭늉을 마셨다. 누룽지 알갱이가 씹혔다. 우리는 할머니집이라는 기억 속의 끈으로 닿고 있었다.

"할머니집이 아직 그대로 있어?" 무심코 이디스는 반말을 했는데, 오래 알던 사람처럼 다가왔다. 

"다행히도 아직은 있어" 주문을 외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 그렇군. 구글맵으로 봤을 땐 집이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다 없어졌어. 할머니는 안 계셔도 그 집은 눈으로 볼 수 있길 바랐어"


그제야 난 테이블 위에 귀걸이를 올려놓았다. 집을 나설 때 그날 폐허에서 주웠던 그 오닉스 귀걸이를 챙겨 나왔다.  난 핸드폰으로 사진 찍는 동작을 해 보였다.

"그때 기억 안 나요?" 

"집은 사라졌어도...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지?" 

"폐허에도 나무가 자라고 꽃은 피니까... " 그 때 문득 할머니가 들려주던 모기향 묻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새 생명은 이 폐허에서 피아난다." 

이디스는 '폐허'라는 단어에 눈빛을 반짝인다.

"일제시대에는 '폐허'라는 잡지가 있었대. 독일의 시에서 따온 문장인데, 이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어. 할머니의 할머니가 불려준 아주 낡은 책이었는데..."

 "완전히 버려진 것처럼 보일 때 태어나는 것들." 


이디스는 중얼거리며 귀걸이를 집어 올렸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 번째 만남이 되는 거네" 

우리 사이를 맴돌던 기억의 퍼즐이 드디어 맞춰졌다. 


백현진 -빛

https://www.youtube.com/watch?v=sWVRM13rS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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