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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May 02. 2024

미드나잇 지하철의 특급 손님들  

동그란 원을 그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로 분명 나아가고 있는데 빙 돌아 도착한 곳은 집이었다. 수지가 떠나고 나는 제 자리에 남았는데 이전의 생활과는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가오는 몇몇 친구들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때뿐이었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졸업반인 우리 모두 취업 준비로 각자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과제와 시험의 끝인 여름방학의 늦은 저녁, 갑자기 내리치는 소나기처럼 꽂히는 펑크록의 기타 소리에 묻혀있었다.


땅 밑의 클럽은 직설적인 기타 소리와 슬램댄스로 폭발 직전이었다. 번개 머리와 스모키 화장, 치렁치렁한 액세서리를 잔뜩 걸친 밴드들은 무대를 날아올랐고 객석은 폭도들이 몰려들듯 소용돌이쳤다. 발밑으로 울리는 진동이 무언가를 깨우는 것 같았다.


내면의 폭동.

펑크록으로부터 내가 보고 싶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뚜렷한 목표 아래 졸업 이후의 깃발을 꽃은 친구들의 소식이 하나둘 들려왔다. 어른스러운 슈트 차림으로 면접을 오가던 그들은 출발선에 안전하게 도착한 듯했다. 번듯한 사회인으로서의 수순이었지만, 어쩐지 그 걸음을 따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펑크록 밴드들처럼 자신을 내던지지도 못했다. 그 사이의 어정쩡함이야말로 거추장스러운 장식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발 딛지 못한 공허함에 대한 분노가 그곳을 뒤흔들고 있었다.


DJ Shadow - Midnight in the perfect world

https://www.youtube.com/watch?v=InFbBlpDTfQ

자정 무렵을 달렸다. 지하철이 끊기는 시간까지 12분 남았다. 밤공기는 제법 서늘하다. 공연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식혀진다. 핸드폰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결승라인에 들어온 선수처럼 사뿐히 계단을 내려갔다. 개찰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시선에 걸리는 장면이 있었다.


티켓자판기 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뒷모습. 긴 머리에 검은 원피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가섰다. 1초 정도 지나쳤는데도 선명하게 그 이미지가 떠올라서 놀랐다. 그는 티켓발권기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 도와 드릴까요?"  


말을 걸며 그를 보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지 화면처럼 시간이 멈춘 순간.

분명 그였다.

폐허 속에서 만났던 오닉스 귀걸이의 주인공. 이미 오래전에 알던 사람처럼 그를 알아본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 이 거, 티켓을 사려는데, 잘 안돼서..."

나지막하면서도 천진한 아이의 톤이 서려있는 목소리였다. 분명 한국말인데 조금 어색하게 들렸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자판기 사용법을 찬찬히 뜯어본 후, 현금 투입구 쪽을 보았다. 지폐를 몇 번 밀어보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식하지를 못했다. 결국 내 교통카드를 꺼내어 밀어 넣었고 곧 티켓이 나왔다. 그에게 건네주자, 그는 현금을 주려고 했다. 그 순간 막차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얼른 타야 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개찰구를 통과해서 막 들어오는 열차에 올랐다. 셔터를 내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와 나는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소주와 고기 냄새가 뒤섞인 막차의 향이 났다. 맞은편 의자에 머리를 기울이고 한창 잠들어있는 십 대 커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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