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May 06. 2024

흑백 영화가 어울리는 사람

어떤 날, 서울의 지하철은 벽을 허물고 달린다.


지하철 문 가까이 강아지 가방을 옆에 놓은 학생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방 안의 강아지가 빼꼼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열차는 한밤 속으로 미끄러져가고 있다. 차량이 덜커덩 움직이는 소리만 들린다.


"우리... 처음 만났나요?"

나는 그가 폐허의 만남을 기억하는지 알고 싶어서 물었다. 슬쩍 나를 바라본다. 비밀을 가득 품은 눈동자였다. 그 뒤로 흑백영화라도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필름 영화의 질감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Gl5ZBcu7c4


".. 서울의 지하철은 처음이에요." 


알아듣기엔 무리 없는 한국말이었지만 외국인의 억양이 스며있었다. 

"여기 사람 아니죠?" 그러자 그가 피식 웃는다.

"한국 사람 맞아요. 서울 온 지 세 달이고, 뉴욕에서 왔어요. 이디스라고 불러요."

등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 목이 깊이 파인 블랙 롱 원피스에 비즈 팔찌를 겹쳐서 두르고 있는 그의 가느다란 팔이 휘적휘적 움직일 때마다 줄에 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이 떠올랐다. 뉴욕보다는 프랑스 70년대 뉴웨이브 풍으로 보였다.


"내 이름은 신이진. 대학생이고, 여기가 집이에요" 나는 지하철 노선표에서 동네를 가리켰다.

이디스는 다른 한 지점에 손을 댔다. "나는... 여기" 

그가 사는 곳은 남산 가까이에 있는 동네였다.

열차가 땅 위로 올라왔다. 빌딩 창 너머의 불빛들이 깜빡거렸다. 출렁이는 네온 간판의 빛은 파도처럼 흘러서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스르르 무너뜨리기도 한다.


"... 흑백영화라면 아까운 장면이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디스가 뻔히 바라본다.

"흑백영화?"

"화려한 색감들을 다 보여줄 수 없을 테니까" 

"더 좋은 게 있죠. 특히 필름 영화라면." 


낯선 사람과의 어딘가 좀 이상한 대화지만 멈추게 되지 않는다. 이디스는 버튼을 누른 로봇처럼 술술 이야기를 이어갔다.

"필름 영화에 보이는 그레인을 좋아해요. 셀룰로이드 필름의 거친 질감."

"아, 아날로그 필름 영화에 보이는 지글지글 그 톡톡하고 거친 입자 같은 거요?" 

"지글지글?" 이디스는 재미있다는 듯 발음하며 말을 이었다.

"기술이 좋아져서 매끈한 디지털로 안 되는 게 없는데도 거친 질감을 좋아하게 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물론, 디지털로도 필름 그레인 효과를 낼 수는 있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필름 영화의 질감을 떠올리며 듣고 있었다. 이디스가 잠시 머뭇거린다.

"아, 미안. 쓸데없이 설명이 길었죠."

"아니요, 난 괜찮아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


"... 그런 얘기가 생각나요. 완벽한 아름다움은..." 어쩐지 수업시간 같아져갔지만 이어가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약간의 결점이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고 하잖아요. 완벽한 비율, 백 퍼센트의 완성도보다도. 걸작은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하던데... 필름의 거친 질감도... 어떤 면에서 그런 거 아닐까요? 매끄럽고 깨끗한 디지털의 완벽함에 없는 어떤 것"

나는 속으로 흑백영화를 떠올리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라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디스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상하죠? 이디스를 봤을 때 흑백영화가 떠올랐어요" 

"올드하다는 뜻은 아니죠?" 


이번에는 같이 웃었다. 지하철 안내방송이 들린다. 이디스의 동네가 가까워지고 있다. 

"내가 늦은 아침을 먹는 작은 식당이 있는데... 괜찮으면 내일 올래요?"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하고 나는 식당 주소를 받았다. 열차가 멈추었다. 지하철 문이 스르르 열리자 이디스는 토끼굴로 넘어간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로 돌아갔다.






이전 05화 미드나잇 지하철의 특급 손님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