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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Apr 25. 2024

손등에서 피어난 꽃

밤바다는 비밀을 알고 있다.


Cibo matto -Spoon

https://www.youtube.com/watch?v=oveep8Rt8RA


공항 가는 길 긴 대로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차창밖으로 젤리빈스처럼 알록달록한 도시의 불빛이 번진다. 밤바다는 무겁다. 바닥은 끝이 없다. 수면 아래로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춤을 춘다. 창을 열어놓으니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바람이 불던 오후.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 수지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아이돌 그룹의 센터 같은 아이. 반마다 한 두 명씩은 꼭 있다. 말하자면, 유미는 그런 애였다. 그 애가 웃으면 주변이 따라 웃고 그의 패션은 유행이 된다. 언제나 대여섯 명이 우르르 무리 지어 다녔고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처럼 그들은 유미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 시절 무리 지어 다닌다는 것은 무난한 학교 생활의 증거이자 따돌림의 반대말이었다. 튀는 것을 싫어하는 수지 역시 유미의 그룹에 속해있었다. 유미와 화장실에 같이 다니는 애가 최근의 절친이었고, 그 무리 중에서도 수시로 바뀌었다. 그 횟수가 사실상 서열이기도 했다. 수지는 한 번도 단 둘이 유미와 화장실을 간 적은 없었다.


유미는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화려한 화장이 어울렸다. 학생 주임 선생님의 눈을 피해 이따금씩 본격 화장을 하곤 했는데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명함을 받은 적이 있다고 자랑하곤 했다. 유미가 웃으면 판단이 정지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산뜻한 매력이라기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위력이 전해졌다. 수지는 어쩐지 그 웃음이 꺼림칙할 때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 수지는 연필을 깎고 있었다. 옆 책상의 유미는 언제나처럼 아이들 사이에서 떠들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연필껍질이 날렸다. 유미의 자리로 흩어져갔다. 수지는 미안하다는 눈인사를 보내고 계속 연필을 깎았다. 책상 위에 뭔가가 탁, 놓였다.


"이걸로 바꾸지? 그전부터 너 주려고 한 건데"


유미가 쓰던 샤프와 똑같은 것이었다. 수지는 샤프를 밀어냈다.

"... 쓰던 걸로 쓸게"

"바꿔! 지저분하고 남들한테 피해도 주잖아."


유미는 압도적인 그 웃음을 짓더니 수지의 손가락에서 연필을 빼내어 바닥에 던졌다. 바닥 위로 연필이 굴렀다. 유미는 샤프를 들이밀고 자리로 돌아갔다. 비어있는 수지의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휑하니 들어왔다. 속이 텅 비고 껍질만 남은 기분이었다.


수지는 가만히 일어나서 연필을 주웠고 바로 유미의 자리로 갔다. 한 손으로 유미의 팔을 붙들고는 손등에 연필을 꽃았다. 연필은 뚝 부러졌다. 요란한 비명소리가 울렸고 유미가 수지를 밀쳐냈다. 수지는 책상에 한번 튕겼다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주저앉으며 유미의 손등에 박힌 흑연이 보였다. 피와 뒤엉켜서 검붉은 작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 유미는 손등에 붕대를, 수지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 수지는 그날부터 공공의 적이 되었다.       

멀리 공항이 보인다. 바람이 거세져서 창문을 닫았다.

"근데 누가 더 나쁜 거 같아? 나랑 유미 중에서?"     

나는 손등의 꽃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글쎄... 일단 상처를 입혔으니 눈에 띄는 쪽은..."

"물론 내 잘못이야. 그 뒤로 유미가 만들어낸 괴담이 퍼져서 그때부터 난 내내 혼자 다녔어. "


수지의 다리 깁스에는 죄의식이 깃들어있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걸음에 의지하려 했던 죄였다. 스스로의 자유를 돌아보지 않은 결과였다. 손등의 꽃 역시 그랬다. 누군가를 함부로 지배하려 했던 오만이 피워낸 것이었다. 유미는 울부짖으며 아파했지만, 고통은 감각할 줄은 몰랐다.


"유미는 일진은 아니었어. 애들 생각을 쥐고 흔드는 정신적 일진이긴 했지. 폭력만 없었지, 따돌리는 데엔 도가 텄어. 처음엔 그럴듯해 보였지만, 결국엔 따 당할까 봐 같이 다니는 꼴이 된 거야. 차라리 사이코로 찍혀서 떨어져 나오는 게 나아. "

"시간을 되돌린다면 어떻게 할 거 같은데?"

" 음... 처음부터 그 무리에 안 들어갔겠지? 지금이라면. 근데 또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일로 그다음부터는 좀 사람을 다르게 보게 됐어."


문득, 수지가 요즘에도 연필을 쓴다는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근데 그 연필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야?"

그때 택시가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트렁크에서 짐가방을 꺼내어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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