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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May 16. 2024

도망간다고 지는 건 아니야

어떤 사람은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왜 이디스는 회사를 안 다녔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부스스한 긴 머리와 블랙드레스 때문에? 옷과 머리 스타일이란 언제라도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만나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을 다 알 수는 없을 텐데. 


그의 눈에는 심연의 끝까지라도 뛰어들 수 있는 집요한 빛이 배어있었다. 이따금씩 직관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의 단호함과 파도를 타듯 일렁이는 불안도 전해졌다. 

무엇을 짐작하든 그 이상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많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서른둘이나 될 줄은 몰랐고, 7년을 만난 연인도 있었다. 여행을 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모국어만 들리는 세상에 있고 싶어서,라고 짧게 답했을 뿐이다.  


"... 이상하네" 가끔 나도 모르게 반응이 나온다.

"뭐가?" 

"보통 뉴요커들은 부심 빼면 시체 아냐? 뉴욕 중에서도 어디 사는지 주인지, 시티인지 진짜 뉴욕 이런 거 따지고 거기에 산다는 게 정체성이 되던데... 우리 과에도 뉴저지에서 온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걔는 뉴요커라고 말하기도 조심스러워하더라고... 진짜 뉴요커들 들으면 웃는다는 거야. 근데 모국어라니? 사실, 한국에 살면서도 내가 한국인 같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하거든."

 이디스는 풋 웃었다.

"뉴요커인지 아닌지는.... 뉴욕을 떠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너도 한국을 떠나보면 알게 될걸? 그리고 나도 별로 뉴요커는 아니야. 거기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물론, 완전한 한국 사람 같지도 않겠지만... 그냥 나는 여기 시민으로 살아보고 싶어. 꿈도 완전히 한국말로 꾸고 말이야."

"한국말로 꾸는 꿈? 이디스... 혹시 케이팝이나 아이돌 좋아해?"

"그거 내가 여기 와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야. 물론, 듣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팬은 아닌데." 이디스는 잔의 얼음을 살살 흔들며 말했다. 유리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찰랑거린다.

"진짜 뉴욕? 여기서도 진짜 강남 그런 거 따지지 않아? 강남 살아도 조금씩 차이를 찾는 걸 좋아하잖아. 뭐 사람들 어딜 가나 비슷비슷해."


무대에 연주자들이 들어서고, 음악이 들려온다. 산들바람 같은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에 묵직한 콘트라 베이스가 나무로 만들어진 아늑한 벽에 닿아 따뜻하게 퍼진다. 어딘가 눈 내리는 날을 떠올리게 하는 곡이었다. 트럼펫이 노래를 한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악기가 이렇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우리는 조용히 그 음악 속에 머물고 있었다.


John Coltrane - My Favorite Things

https://www.youtube.com/watch?v=JQvc-Gkwhow

가만, 수지가 좋아하는 노래다. 우리가 듣던 것과는 다른 버전이었지만, 수지는 지금 '페이버릿 씽스' 리스트를 많이 늘려가고 있을까?


다음 연주자들이 들어선다. 악기를 세팅하고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그중 베이스 주자가 이디스의 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삐죽이 뻗친 머리에 조금 구겨진 셔츠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그의 이름은 승준이었다. 우리 테이블에 와서 스몰톡을 나누고 인사도 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고 나갔다 오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다급하게 다시 와서는 이디스에게 무슨 요청을 했다. 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재촉하다가 그는 무대로 돌아갔다.


"진, 나 이제 가봐야겠어." 그는 나를 진이라고 부른다. 이디스의 표정에 그림자가 졌다. 

"응? 지금?"

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들어올 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넌 조금 더 듣다가 가. 난 오늘은 안 되겠어. "

같이 나가려 했지만 그는 극구 말렸다. 혼자 걷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아서 연주를 들었다. 피아노 자리가 비어있었다. 조금 빈 듯한 연주도 괜찮았다. 무대가 모두 끝나고 자리를 뜰 때 승준이 다가왔다. 

"연주 좋았어요!"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오늘 피아니스트가 급한 일이 생겨서 셋 리스트를 좀 바꿨어요."

"그래요? 저는 그냥 그런 줄 알고 들었어요"

"사실 급하게 요청한 것도 예의는 아니죠. 이디스가 쳐주면 좋았을 텐데"

"네?"

그 순간 무언가가 깨졌다. 


도망가듯 떠난 이디스는 이 도시의 밤을 혼자 걷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커다란 비눗방울 막이 감싸고 있어서 그 안에서 뚜벅뚜벅 발을 내딛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테두리 안으로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 



선우정아 -도망가자

https://www.youtube.com/watch?v=0q6DR6Ei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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