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May 20. 2024

공주를 구하는 중세의 기사처럼

메일 전송을 계속 클릭하는 나날들이다. 


입사지원서를 몇 백장을 넣었느니 하는 말들이 무용담처럼 떠돌았다. 잘 팔리는 자기소개서와 면접 비법을 알려준다는 모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초대를 보내온다. 지난 취업설명회 이후 메일함은 취업정보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떠밀려 걷는 것 같았다. 종아리에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거웠지만 휘적휘적 움직인다.


새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메일함 속에 하나의 돌멩이 같은 메일이 날아들었다. 헝가리로부터 수지가 던진 돌멩이였다.


이진, 잘 지내고 있어?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지 98일이 지났네. 여긴 요즘 비가 자주 오긴 하는데, 세수하고 난 얼굴 같은 맑은 하늘도 종종 보여. 한국은 지금쯤 여름 방학이겠군. 

난 동네의 작은 화랑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어. 운이 좋게도, 지금 머무는 홈스테이 주인아저씨가 운영하는 아주 작은 갤러리인데, 거기서 작품을 포장하는 일을 돕고 있어. 작품을 사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데, 헝가리의 화가들과 콜렉터들을 만나는 일이 재밌기는 해. 


난 구석에 몰래 숨어있는 작품들에 끌리곤 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낯선 그림들 말이야. 손님이 없는 날이면 한참 동안 창고 속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는 그림들을 찾아보기도 하지. 중세의 어느 성에 사는 기사가 되어 잠자는 공주를 깨우기라도 하듯 남다른 심미안으로 숨겨진 걸작을 발견해 내서 세상에 빛을 보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주인에게 말해서 눈에 띄는 자리로 이동시키는 것. 그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야. 


그림은 피카소의 입체주의처럼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표현한 작품인데, 거리의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어. 너무 흔해 보이기도 해서 눈에 띄지는 않는데 한참을 보고 있으면 멜로디가 들릴 같은 긴장감이 있지. 게다가 그들의 표정도 달라진다. 정말 어떤 그림에서는 음악이 들린다니까! 표정도 바뀌어. 너와 같이 보고 있지 않은 너무 아쉽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일들은 실타래처럼 이어진다! 


그렇게 내가 자리를 옮겨온 작품을 자주 와서 보고 가는 사람이 있어. 그는 여유로운 콜렉터 같지는 않고, 한눈에 봐도 공부하는 학생인데 오후 5시가 되면 화랑에 나타나서 둘러보고는 그 그림 앞에서 머물다가 해 질 녘에 돌아간다.

어제는 내가 한번 말을 걸어봤어. 이 그림을 좋아하는지 말이야.


그는 이렇게 말했어.

"난 지금 이 그림을 내 것으로 만드는 중이에요."

"그래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노래가 있어요?" 그는 나한테 되물었어. 머릿속에 여러 노래들이 떠다녔지만 나는 처음으로 생각난 곡을 말했어.

"그걸 내 걸로 만들려고 무엇을 했나요?"

"많이 들었죠. 듣고 또 듣고... 지금도 들어요."

"그럼 알겠죠?" 그는 웃으며 답했어. 그날 처음으로 웃는 표정을 봤는데 웃을 때 덧니가 슬쩍 보이는 사람이었어. 그때 문득 무해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지. 그는 콕 집어서 말해주었어.

"이 그림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을 투자하는 중이에요."  


그의 이름은 마자르야. 내일은 마자르에게 이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물어봐야겠어. 모처럼 할 얘기가 궁금한 사람이 나타나서 조금 들뜬 심정으로 메일을 보낸다.

이진, 너도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줘.

소식 기다릴게.

부다페스트의 어느 골목 화랑에서, 수지.


수지가 던진 돌멩이는 건초더미를 호숫가로 만들었다. 5월의 어느 화창한 날 작은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구름을 올려다보는 장면을 떠올렸다. 수지가 늘 쫓는다고 했던 구름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선명해졌다. 그 구름의 빛을 빌려서 내게 불어오는 폭풍 같은 바람이 잔잔해지길 바랐다. 


그리고, 수지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카니발 -비누인형

https://www.youtube.com/watch?v=sF-zJeVpM1Y









 


이전 09화 도망간다고 지는 건 아니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