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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Nov 11. 2024

나무의 시간을 사는 법

뉴욕에서 명륜동까지

내가 심은 나무는 아니었다.


뉴욕에 사는 작가 빌 헤이스가 책에 털어놓은 이야기다. 이제 막 이사 온 아직 춥고 쌀쌀했던 4월의 좁은 아파트. 6층의 방 창밖에는 나무들 너머로 맨해튼이 보였다. 언젠가 조경설계사에게 물었더니 인도네시아에서 온 도시 잡목으로 '천상의 나무'라는 뜻의 '에일란서스 Ailianthus' 종이라고 했다. 어느 모로 보나 아름답다고 할만한 나무는 아니었다.


커튼도 차양도 아무것도 달지 않은 그 맨 창에 그저 나무들만 보였다. 볼품없는 앙상한 가지들이 흔들렸다. 비바람이 불면 흐느적거렸다. 그는 아침에 눈뜨면 창 너머 그 나무들을 1분 동안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연인을 사별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의 생애 단 하나뿐인 연인이 바로 빌 헤이스였다. 다 지난 일인가 싶다가도 이따금씩 견디기 힘든 비통함이 찾아올 때 그는 악천후 속에도 꿋꿋이 버텨내는 나무가 있는 그 창문만 바라보았다. 


'어떤 아침에는 나뭇가지들이 이파리처럼 가볍게 바람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이 험악해지면 검게 흐느적거리는 형상이 너덜너덜해진 신경종말 같았다.'


빌 헤이스는 그 창을 '나무 TV'라고 불렀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앙상하던 가지에도 싹이 돋고 잎이 났다. 아파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주었고 폭풍우 치는 한 여름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헝겊인형의 형상으로 휩쓸리기도 했다'. 폭설로 소복이 쌓인 눈더미를 가지가 견뎌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를 단련하는 나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실의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나무 TV'를 중계하는 글에는 그 단단함과 회복력이 살아있다. 그것이 바로 '에일란서스'의 세계였다.


아름답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그 나무들은 큰 위로가 된다. 마음을 둘 곳이 없을 때,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화창하거나 비가 오거나 늘 그 자리에서 악천후를 견디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반드시 지나갈 것이라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잊기 쉬운 진실을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나 보이지만 누구나 보는 것은 아닌 세계.


일상철학자 알랭드보통 역시 자신만의 나무TV를 가진 사람이었다. 도시의 떠들썩한 생활에 지쳐갈 때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내 안의 천박한 욕망과 노여움을 발견하게 될 때면 그 시선은 자연에 머물렀다. 그가 본 나무에 대한 기억 역시 페이지에 살아있다.

알랭드보통의 나무TV의 주인공은 떡갈나무였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 떡갈나무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된 듯 축축한 지붕처럼 우리의 머리를 덮고 있었다. 비는 4만 개의 잎 위에서 타닥타닥 떨어지며 화음을 만들었다... 나무는 폭풍 속에서도 언짢아하지 않으며... 수많은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질척한 흙속에, 중앙의 줄기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손바닥에 빗물을 받치고 있는 가장 높은 잎들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곳에 파묻은 채 만족할 따름이다.'   

 

떡갈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나무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이 서 있다. 빗방울과 나뭇잎의 합작 연주를 들으며 폭풍우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인내의 시간에 다가간다. 세상은 그렇게 움직인다.


서울의 명륜동, 성균관의 마당에는 500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곳을 자신의 정원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 2012>로 알려진 정기용 건축가이다. (나는 내가 사는 도시를 정기용 건축가의 시선을 통해 다시 보는 법을 배웠다. 후에 이에 대해서 더 써보려 한다.)

성균관에 갈 때면 그 은행나무 아래 서보곤 한다. 건축가에게 '나의 정원'이 되어주었던 그늘을 올려다본다. 책에 적어 내린 그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듯하다.


'11월이 지나 마당 가득히 노란 은행잎이 떨어질 때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제정신을 잃는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계절마다 선사하는 이벤트다. 오래된 나무는 그 자신이 살아있는 신화다. 모든 것이 변하는 도시에서 이렇게 500년 넘게 자란 나무와 교감할 수 있는 정원을 갖고 있음은 나를 명륜동에 매어두는 남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명륜동 앞의 은행나무는 단순히 오래되어서만이 아니라 나무들이 통상적으로 갖는 정직함 때문이다. 그는 위장하는 적이 없다. 어느 때 어느 순간이든 나무는 그의 오랜 성장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성장이 형식이며 곧 내용이다.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진 그 무엇이 이처럼 확실하게 침묵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하늘 쪽에 가까운 작은 가지 사이에 핀 잎새가 땅속 깊숙이 어딘가에서 단단히 흙으로 더듬는 잔뿌리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연속된 하나의 생명체이다. 

나무는 그 자신이 집이자 삶이다. 

자라나는 집이다. '                           

-<서울이야기>중에서, 정기용  

성균관 앞마당의 정기용 건축가 (2009, 사진 김재경)


나무들의 정직함을 생각한다. 자신의 성장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나무는 '자라나는 집'이다. 그리고 누가 보든 말든 계절의 섭리를 따라 성장하고 있는 나무의 생애는 끝도 없는 불안과 신경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암시가 된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너도 해낼 수 있다고. 


나무를 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장성함을 볼 수 없다고 해도 다음에 올 이를 위해서 기꺼이 수고를 해내는 잔잔하고도 겸손한 희망이 고개를 든다. 모두가 내 손으로 나무를 직접 심을 수는 없다 해도 이렇게 물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동네에 나만의 나무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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