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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닥터 마틴, 그리고 친구

펑크록에서 클래식으로

by 베리티

워커를 신고 걷는 여학생들을 본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디테일은 조금 다를 수 있어도 언제나 그 옷차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발목까지 오는 워커에 짧은 치마를 걷고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은 단단하다. 조신하다거나 단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걷는 것이 좋았다.

언젠가 스쳤던 어느 작가는 하이힐 신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힐을 신으면 시선도 높아지고 저절로 긴장하게 되어서 당당한 태도를 갖게 된다는 이유였다. 자기소개를 할 때 그 얘기를 했던 걸 보면, 하이힐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종의 페르소나로 여기는 듯했다. 키도 크고 화려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그녀는 그 소개로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어떤 이야기가 흥미를 끄는지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을 뿐 아니라, 어쩐지 일도 시원시원하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신발은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는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겠다. 모든 패션이 그렇듯이.


어느 드라마작가 선생님에게 누군가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입어야 좋은 남자 만나요?" 알코올 기운이 묻어있는 그 질문에 슬쩍 웃었다. 선생님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당황했을 것이다. 한 마디만 하셨다. "너희들 운동화는 신지 마."

그때 내가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였을까. 그다지 공감은 되지 않았지만, 웃자고 하신 얘기 정도로 넘겼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하이힐은 쇼핑 리스트에서 오래 머문 적이 없다. 일명 '프러포즈 구두'로 불리는 마놀로 블라닉 같은 스테레토 힐을 신은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한창 몇 센티미터의 굽을 신느냐가 친구들 사이의 이슈로 떠오를 때에도 그저 남의 일처럼 들었다. 나의 경우에는 오래 신어도 발 아프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신발이 좋았다.


얼마 전 대학 강의를 나가는 지인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자리를 뜰 때 즈음, 그가 들러야 할 곳이 있다고 했다. 법학 박사인 그녀가 지목한 곳은 닥터 마틴 매장이었다. '닥터마틴'. 그 브랜드 이름을 듣는 순간 아주 시고도 알싸한 레몬사탕을 삼킨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나는 그 위치를 알고 있어서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결코 점잖다고는 할 수 없는 구두. 사실 쫌 불량스러울 수 있는 이미지.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그런 펑크록커의 신발에 관심을 갖게 된 거지?


닥터 마틴은 영국에서 태어난 60년 넘는 전투화 스타일의 구두 브랜드이다. 일명 '정형외과 신발'로 통하는데

실제로 군의관 출신의 설립자가 스키를 타다가 발목을 다쳐서 이에 맞는 신발을 만든 것에서 유래되었다. 록커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있는데, 앞코가 뭉툭한 그 투박한 디자인이 쓰리코드 펑크록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라이브클럽이나 록페스티벌에 가면 흔히 보는 옷차림, 그 마무리는 닥터마틴일 때가 많다. 신발 하나 떠올리는데 페스티벌의 기억이 펼쳐지면서 즐겨 듣던 음악들이 들려오는 것 같다.


매장에 들어와 본 게 얼마만이었을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홀리기라도 한 듯 구두에 다가섰다. 어릴 적 보던 그 디자인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리폼을 해서 꾸미기 나름이겠지만 기본 디자인은 여전했다. 어느새 우리는 정신없이 구두를 골라 신어보고 있었다. 예전에 좋아하던 디자인을 물어본다. 그건 이미 품절되었고, 리이슈로 나온 구두가 있어요. 록커를 떠올리는 패션의 직원들은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구두를 신고 거울에 비춰보다가 방향을 틀어서 걸어보니, 한쪽 벽면은 레코드판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섹스 피스톨즈, 너바나, 플릿우드 맥, 더 후,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악틱 몽키스, XX... 익숙한 앨범 커버,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한가득이다. 아, 내가 좋아하는 시간의 차원이 이곳에 겹쳐있구나. 구두를 하나 신고 내가 존재하는 시간 안에 슬쩍 발을 들인 기분이 들었다. 런던 캠든 거리라도 다시 걸어야 할 것만 같다.


자, 감격은 이제 그만.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 왔다. 좋은데, 지금 내가 신어도 괜찮은 거 맞나? 나는 더 이상 십 대, 이십 대도 아닌데 이럴 때인가. 잘 어울린다는 직원의 말은 프로페셔널한 태도가 반영된 것일 뿐이겠지.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손님들 같은 분들도 많이 오세요. 그러고 보니, 단순한 디자인이라서 어쩐지 클래식한 느낌도 있다. 더 이상 짧은 치마에 워커 차림은 아니지만, 아직 청바지에는 유효하다. 그때 그녀가 옆에서 신발끈을 묶으며 말한다. 이거 신으면 강의할 때 발 안 아플 거 같아요. 디자인도 단순하고 좋은데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 지갑을 열었다. 우리는 거대한 종이백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나는 부츠와 구두, 두 켤레나 사고 말았다.


오월 한낮의 거리는 장미처럼 싱그럽다. 알록달록한 보도블록 위 거리 한쪽에서는 버스킹이 한창이다. 인파가 몰려들고 징징대는 기타의 사운드에 말소리가 묻힌다. 음악 소리가 옅어져 갈 즈음 나는 물었다. 어떻게 닥터 마틴을 알게 된 거예요? 록음악과는 거리가 먼 그녀가 이런 차림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궁금했다.

"외국인 친구가 있어요. 체코 애인데 신발이 좋아 보여서 물어봤지요."

"체코 사람이면 찐 보헤미안인데!" 나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안 그래도 보헤미안 얘기를 했지요."

그녀는 핸드폰으로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오렌지빛이 도는 긴 머리에 안경을 쓴 체코 여학생이 보인다. 웃고 있지는 않아서 내성적으로 보였지만 밝은 분위기가 있다. 나와 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이래서 좋은 거구나.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늘 익숙한 패턴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으니까.


예전에 짧은 치마에 검은 워커로 통하던 그 구두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한국에 공부하러 온 체코 여학생의 발걸음으로, 또 강단에 서서 설명하는 친구의 든든한 발걸음으로, 그리고 록음악의 기억을 안고 묵직한 클래식으로 다가온 구두의 끈 매무새를 다잡는다.


시간과 세월이 하나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또다른 세계가 된다.

무수한 발걸음을 기다리는 그 길은 여전히 환하고 거리는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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