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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판타스틱 소녀백서>를 볼 때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

by 베리티

같은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비슷한 취향일 거라 짐작한다면 착각이다. 그러기에 늘 의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모처럼 친구 집에 모인 저녁, 대화 도중 익숙한 영화가 스쳤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극장에 걸린 지 20년도 넘은 영화. 당시에도 흥행작은 아니었지만, 작은 극장에 걸려 입소문을 타던 영화였다. 이유 없는 심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10대 특유의 감정들. 두 소녀의 시시콜콜한 심통과 악행들을 밉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이야기. 내가 기억하는 건 그 두 주인공 캐릭터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는 거다.


"스티브 부세미처럼, 우리도 그렇게."

"응? 스티브 부세미?"

맥주잔을 잠시 내려놓는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스티브 부세미는 시니컬 여왕 두 소녀들의 놀림 상대다. LP가게에서 레코드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혼자 사는 쓸쓸해 보이는 중년남. 그를 골탕 먹이러 접근했던 소녀들도 차차 그가 자신만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다시 보게 된다. 잘 보이진 않아도 이 세상 어느 구석에는 꼭 존재할 것만 같은 사람.


친구들은 요즘 레코드판 모으기에 한창이다. 그런 취미를 가졌다는 뜻으로 스티브 부세미를 말했는지 모르겠다. 근데 좀 더 들어보니 농담 같은 부러움이 아니다. 혹시 진짜 그를 롤모델 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않았다. 묻는다고 뭐가 달라질 거 같진 않다. 어쨌든 그 캐릭터에 대한 묘한 '경의'가 대화에 감돌았다. 무엇에 대한 경의인지는 캐지 말기로 했다.


영화를 보던 그때는 딴 세상 얘기였던 스티브 부세미의 나이에 우리도 더 가까워졌다. 영화에서 세상 불만 가득한 아니드가 인종차별에 대해 말할 때, 스티브 부세미가 이렇게 말한다.


"차별은 요즘이 덜 해. 서로 적대시하지만 어떻게 감춰야 하는지를 알지"


여기서 차이를 보여준다. 그 소녀들이나 그나 모두 인싸가 되지 못한 세상 언저리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는 어른의 태도를 알고 있다.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싫다고 일일이 다 드러내면서 살아간다면, 어른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어떤 의미든 적당히 감출 줄 알아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 사이 균형을 잡는 것.


문득, 궁금해진다. 그 영화를 본 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어른이 되었을까. 그 친구들은 음악모임에서 만나 여기까지 왔다.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사건들이 따라왔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멀쩡한 사회인으로 지내고 있다. 그럼 된 건가.


언젠가 펑크밴드를 하던 지인에게 고민을 말했더니, 그는 말했다. 좀 더 어른스럽게 대하는 법을 찾고 있다고.번개 머리를 하고 무대를 휘젓던 그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 심정이 묘했다. 어른이라는 것이 대체 뭘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 리베카 솔닛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마린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펑크록의 전성기를 살았던 그들. 마린은 '세상에 내보일 캐릭터를 절박하게 구축하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친구였다. '남들도 그 속에 살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재능'. 십 대 시절 눈에 띄는 빛나는 캐릭터의 전형이었다. 솔닛과 함께 온갖 모험의 시간들을 보내지만 그런 캐릭터의 친구들이 그렇듯 늘 불안했던 마린은 결국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

굳이 27 클럽(27세에 사망한 음악가들)을 말하지 않아도, 찬란했던 젊음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나도 왜 그들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지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렇게 절친을 잃은 솔닛이 전한다. '십 대에 요절을 상상하는 것은 성인이 감당해야 하는 온갖 부담과 결정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 상상하는 것보다 죽음을 상상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라고.


<판타스틱 백서>의 원제는 'ghost world'다. 18살 이니드와 리베카에게 세상은 유령 같은 곳이었을까. 결국 이니드는 스티브 부세미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한다. 그리고 이니드가 말하는 자신의 첫 번째 꿈을 향해 간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 늘 지나치던 버스정류장에 멈추어 버스에 몸을 싣는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야기하던 그 장면이다. 고스트 월드를 떠나는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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