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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보더의 마인드로

Smells Like Teen Spirit

by 베리티

"I'm super chill!"

이상한 수상소감이었다. 눈길을 헤치고 금메달을 목에 건 스노보더는 손을 들어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환한 웃음이 더 눈부셨다. 평창올림픽의 클로이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보딩을 마치고선 햄버거와 피자가 먹고 싶다고도 했다. 그 천진한 웃음에 보는 사람까지 전염된다. 어떤 일을 마치고 나서든 나도 이런 태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바꾸는 것으로 알려진 경험들이 있다. 이를테면 우주로 나간다든지 오로라를 본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그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들. 우주를 나가 '창백하고 푸른 점'이 된 지구를 본다. 극지방 가까이 도달해서 머리 위로 드리우는 오로라를 마주한다. 그 이후의 삶은 전과 같아질 수 없다고들 한다. 난 여기에 스노보드를 더 보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본다. 우주선이나 오로라에 비해서도 훨씬 가까이 있다.

그렇다고 하늘을 나는 올림피언 수준이 될 것까지는 없다. 물론 그들의 세상은 내가 아는 이상이겠지만, 눈 덮인 슬로프를 그저 지그재그로 내려가기만 해도 충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넘어지지 않고 내려오기만 해도 그렇다. 나만의 리듬감과 발밑에 스치는 눈발의 감촉, 뺨에 부딪혀오는 겨울바람. 특히, 어두운 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눈밭은 다른 모든 것들을 잊게 만든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에 이 세상 전부 같다.


베이징 올림픽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 경기를 보았다. 남자 선수들의 놀라운 기술은 압도적이었다. 1800도 공중회전? 과연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가능한 영역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계는 깨어진다. 오늘도 그 장면을 목격한다.

이 경기의 매력은 선수가 먼저 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경기에서 선수 자신이 먼저 그 결과를 알게 되겠지만, 스노보드는 좀 더 주관적이다. 심판의 점수가 나오기 전, 모든 코스를 마치고 도착하기 전에 선수가 이미 감으로 알고 실망하거나 아니면 자신감을 표현하는 정도가 더 강하다. 시간 싸움도 아니고, 회전만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마지막 도착하는 순간 자신만의 느낌이 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남들은 나 몰라도 나는 아는 어떤 미세한 차이. 스스로의 기준에서 느껴지는 판단. 그거야 말로 진짜 고수의 영역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환호하며 들어오는 선수들은 대부분 좋은 점수를 받는다. 나도 모르게 환호가 터진다.


진짜 명장면은 여자 슬로프 스타일에서 나왔다. 번호판을 비스듬하게 어깨에 내려 맨 뉴질랜드 보더. 해설가가 '배짱이 있는 선수'라고 소개한 조이 사도스키 시놋. 이 경기의 특징은 그냥 시작한다는 것이다. 출발인지 아닌지 슬슬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작.

남자 선수만큼 파워가 있거나 스피디하진 않았다. 이상했다. 그렇다고 차분하다고 불안하다고 하기도 애매한 느낌으로 계속 달리고 있는데, 한 단계 한 단계 스르르 해내는 거였다. 완벽하게 매끄럽지도 않은데, 계속 나아가고 착지하고 또 속도를 내는 동작의 연결 속에, 또 다른 것이 보였다. 그는 보드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타고 있었다. 의지가 앞선 게임이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장애물, 눈의 움직임 그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회전을 마치고 안착. 세 바뀌를 돌면서 균형을 맞추려고 팔을 휘젓는 모습마저도 자연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자 손을 번쩍 들면서 들어왔다. 원했던 것을 해냈다는 확신!

경기는 끝났는데,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이때 다른 선수들이 그에게 달려와서 넘어뜨린다. 은메달, 동메달이 확정된 선수들이다. 멋진 경기를 보인 선수에게 보내는 축하들이 눈밭을 구른다. 메달의 색깔이 바뀔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즐거웠다. (와, 아무리 그래도 금메달 욕심이 없었을까, 경쟁자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멋지다). 점수가 발표되고, 그는 금메달 확정. 그리고 결선에 진출한 모든 선수들이 우르르 나와서 얼싸안고 축하해준다. 이렇게 멋진 장면이 실화다! 그들 모두가 스노보드를 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스노보드 세계랭킹을 보면 10대의 기세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어릴수록 잘 타게 되는 이유가 있을까. 전문가들은 경험은 확실히 이점이지만, 나이가 들면 어렸을 때처럼 위험을 무릅쓰지 못하게 된다고 전한다. 한 바퀴 더 돌고, 더 어려운 그립을 잡기 위해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일을 두려워 않는 젊은 패기가 곧 비결이라는 것이다. 뭔가를 잘 몰랐을 때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릴 적 덤벼들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면, 특히 그렇다. 이미 알고 난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했을 그런 일들이 있다. 모르는 것에도 어떤 힘이 있다. 모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


또 한 가지, 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단순히 잘 타는 것을 넘어 바람과 같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부터 살아남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시놋을 보면서 느꼈던 바로 그거였다. 그가 보드를 타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잘 타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


보더들이 마냥 아이처럼 천진하다고 해서, 마냥 즐기면서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험한 익스트림 스포츠인 것은 현실이다. 알고 보면 부상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선수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렇지만 날기 위해서는 넘어져야 하고, 반복해야 하고, 쓰려졌다가 일어나야 한다. 또 그럼에도 기꺼이 보드를, 슬로프에 나가는 루틴을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모든 흐름을 받아들인다. 통제할 수 없는 바람까지도.


오늘, 보더에게 배운 것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둔다.


베이징 여자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 결승 영상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88179&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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