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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지만 따뜻해서 좋아

by 베리티

소나기가 퍼붓던 가을날이었다. 비바람에 우산을 바로 잡고 걷기조차 힘든 어느 저녁, 미팅이 있어서 빗길을 헤치고 카페로 향했다. 감기를 심하게 앓던 중이었는데 쉴 수 없다 보니 여러 가지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기침으로 핼쑥해진 얼굴에 눈의 실핏줄까지 터져서 한쪽 눈이 거의 호러영화 수준이었다. 전화를 받고 못 나간다고 할까 몇 번을 망설였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어서 억지로 나갔다. 꽤 오랜만에 만난 피디였다.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바로 일 얘기로 들어갔다. 나의 흉측한 몰골에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얘기가 끝날 때까지 그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사실 방송계 사람들은 외모 지적이 심한 편인데, 그날따라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 피디야 오래 알던 사람이라 그렇다 쳐도 문제는 제작사 대표였다. 알던 사람들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르게 신경이 쓰였다. 한창 회의 도중 들어온 대표님은 간단한 인사와 함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회의는 별 탈없이 마무리했다. 그러고 나서 차를 마시다가 대표님과 시선이 부딪혔다. 시뻘건 나의 눈을 보는 건가. 왜 눈이 그러냐고 물으시려나. (아팠기 때문에 더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거 같다. 평소엔 부스스한 차림으로도 잘 다니면서 말이다.)


대표님 얘기는 근처에 잘하는 국숫집이 있으니 같이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빗줄기는 조금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나는 다음에 가면 좋겠다는 대답을 했고, 주변 스태프들도 그날 다 코앞에 닦친 일 때문에 못 간다고 했다. 그러자 어서들 일하라고 하시면서 홀로 나가셨다. 아마도 다른 동행을 찾아서 그 국숫집에 가셨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이상한 편안함을 느꼈다. 아무도 내 호러영화 버전 얼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평소에 머리스타일만 바뀌어도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인데, 분명 몰라서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모른 척한 것이다. 이제 일 같이 해야 하는데, 아프냐고 물어봐야 좋을 것도 없고 사실 눈 실핏줄 터진 건 보기엔 어마어마해도 증상은 없다. 굳이 얘기할 이유가 있을까. 또 하나, 온갖 작가들을 겪어봐서 이 정도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아프거나 사고도 많은데 그깟 감기에 눈 실핏줄 터진 게 뭐 대수라고.


어쩌면 다른 일이 너무 바쁘고 경황이 없어서 안중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상황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친절한 무심함이라고 할까.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하나하나 캐물었다면 그날 더 피곤했을 것이다. 그래도 시뻘건 눈을 쳐다보며 회의하는 것도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아무도 티를 내지 않은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그런 일도 있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 중에 동거하는 피디가 있었다. 나만 눈치챈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스태프들 모두 다 아는 거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동거쯤이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말하다 보면 드러나는 일인데도 유독 그 사실만은 꺼려했다. 그래서 다들 알면서도 아무도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가 출근할 때 여친의 차를 함께 타고 오는 걸 봐도 못 본 척 돌아서 가고, 전화 통화할 때 같이 사니까 오가는 대화들이 있어도 못 들은 척했다. 그렇다고 '자, 우리 그건 모른 척 해주자' 그런 다짐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일부러 놀라는 연기들을 해서 그를 놀려주기는 했다. 사람은 정말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인가 보다. 그는 그때까지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줄 알았다고 했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에 그런 부분이 있다.



오래전에 나는 여러 해 동안 수요일 밤마다 크리스 할머니 집에서 포커를 했다. 크리스 할머니는 70대 노인으로, 페이즐리 숄과 술 달린 베개, 낡은 동물 박제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스스로 게이임을 깨닫고 있는 중에 있다. 가족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크리스 할머니에게 내가 게이인 것 같다고 말하자, 할머니의 흐릿한 파란 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얘야, 내가 네 나이였으면 나도 한번 그래 보고 싶구나." 크리스 할머니는 나를 껴안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내가 바랬던 대로 할머니는 내 이야기를 사소한 일로 여겼을 뿐이다. - <프로빈스타운> 중애서, 마이클 커닝햄



친한 사람들에게 더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누구나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다. 상대적으로 약자가 되거나 불리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이 모든 걸 비밀 없이 털어놓아야, 일일이 묻고 따져야만 본모습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다정한 말을 건네거나 껴앉아주지 않아도 된다. 이것저것 물어봐줄 필요도 없다. 모르는 척하거나, 별일 아닌 것처럼 대해주는 태도를 무심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심함으로 위장한 그 따뜻함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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