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하늘을 날고 있을 때

After the Book :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 #5

by 베리티

소설가가 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백 년의 고독>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최후는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남자로 마무리됩니다. 마르케스가 민담에 상상력을 더해 쓴 설정이었습니다. 근친상간에서 비롯된 저주이자 파멸을 상징하는 것이었죠. 흔히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가득한 환상적 세계가 소설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쓴 후 그는 편지를 하나 받습니다. 실제로 돼지꼬리를 가졌고 소설의 인물처럼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독자의 고백이었습니다. 픽션으로 구상해 낸 세계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충격적이었을까요.

상상이고 가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어떤 면에서는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역사적 흔적일 수도 있다거나, 허구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이어져 현실의 깊은 곳을 찌른다는 생각으로 아찔해집니다. 이 세상의 어떤 차원에서는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죠.


마르케스 같은 거장 소설가뿐 아니라, 작고 사소한 에피소드를 남기는 무명의 기록자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제 책에 나오는 -극장에서 왜 줄을 서는 거죠? 꼭지를 쓸 즈음으로 기억하는데요. 사실 저는 종로의 허리우드 극장을 내 집처럼 드나든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낙원상가에 있던 그 극장은 저보다는 훨씬 윗 세대의 장소였고, 저는 대학로 동숭동이나 신촌 일대의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꼭 그 극장에서만 하는 영화가 있어서 낙원상가를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낙원상가가 낯설게 보였던 것 같고, 옥상에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다가 낙원아파트에 시선이 머물곤 했어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나,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종로 한복판에 사나. 그런 궁금증과 함께요. 제가 악기에 대한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있어서 낙원상가를 유심히 봤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 핸드폰으로 낙원아파트를 찍고, 당시에 쓰던 블로그에 사진 몇 장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블로그 이웃이 자신이 살던 곳을 사진으로 보게 되어 반갑다는 댓글을 남겼습니다. 검색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한창 댓글을 달면서 교류하던 그 이웃이 낙원아파트 9층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봤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마르케스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겠지만, 꽤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이웃분과 음악 취향이나 농담 코드도 비슷해서 댓글이 오가고 있었는데, 그곳에 살았었을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죠.

지금은 외국 거주 중인데, 미술가이고 한국에서 좋은 작업 환경을 찾아서 돌아다닌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북촌에서 전시를 연다며 초대해 주셔서 직접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또 그 전시 큐레이터가 제 남편의 지인이어서, 이미 그 만남 전에 여러 가지로 얽혀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취재하고 만났던 미술가 서도호 작가와도 대학 선후배 사이였어요. 친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아무튼 유명 작가의 대학시절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만난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블로그를 하면서 계속 인연이 이어졌는데요. 심지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의 얼굴을 실크스텐실 판화로 제작해서 보내주기도 하셨어요. 그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사실 최애 뮤지션은 보통 말해도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말을 잘 안 하거든요. 하지만 그 이웃분은 알고 있었어요)

그 판화는 지금까지 제 방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글을 봐주시며 책이 되어야 한다고 늘 얘기해 주셨고, 그래서 이번에 책을 가장 먼저 그분께 부쳤습니다. 너무 기다려진다고 답을 주셨어요. 아마도 책이 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중일 것 같네요.


사실, 저는 온라인 활동에 그다지 활발한 편이 아니라, 얼마 되지도 않는 블로그 이웃 중에서 그런 인연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보는 사람 많지 않아도 계속 글을 써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글쓰기에 대해 두 가지를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향해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것.

어떤 결과를 바라거나 계획을 세워놓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속할 수 없는 수만 가지의 이유가 있죠. 해야 할 일도 많고, 바쁘고, 그런 것에 시간을 쓰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질문도 떠오를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비난이 올 수 있죠. 하지만, 돌아보면 저는 그나마 그 신호를 기억하고 있던 일들이 저를 지켜주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걸 소홀히 해서 놓친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아쉬워하게 되지요.


또 하나는, 무엇을 쓸 것인지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케스가 받은 편지처럼, 혹은 어느 무명 블로거의 우연한 사진처럼 그 세계가 쓰는 사람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상상이고 허구라고 해도 함부로 펜을 들 수는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구의 구석 어느 다락방에서 투닥투닥 가볍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을지 몰라도, 내가 속한 거대한 세계의 일부를 건드리는 파장이 될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움추러들어서 아무것도 쓰지 못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책임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쓰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준비 같은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기록이 '육신이 되어' 나를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서늘하고도 서슬 퍼런 위트로 유명한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조언이 떠올려 보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도 젊은 작가에게 꼭 조언을 하라면, 앨리스 먼로의 말처럼 "원하는 대로 하고 결과는 스스로 감수하라."라고 말하겠어요. 아니면,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 혹은 "공들여 쓰다 보면 사회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말하겠어요.

-<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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