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슬렁거리는 일에 대하여

After the Book :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 #9

by 베리티

"어슬렁거리는 게 제일 재미있지!"


늦은 밤 틀어놓은 TV에서 들려온 한 마디에, 화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굉장히 낯설게 들리는 말입니다. 정말 그런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꿈의 장면이 잠깐 스쳐간 것 같은 기분인데요. 책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는 워낙 어슬렁거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취미가 어디 내놓을만한 훌륭한 것인지는 답할 수 없어도... 애초에 그런 것을 따졌다면 어슬렁거리지도 않았겠지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요즘에야 작정하고 시간을 내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어슬렁거리던 일들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있었어요. 친구들을 만나면 마냥 돌아다니며 놀던 시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그러다 보면 친구들이 따라오고, 그러다 갈 사람 가고, 시간 되는 사람은 계속 머물고 그러다 밤을 새기도 하고, 그런 시간들이요.


걷는 것을 좋아하는 건 기본이었지만, 음악을 좋아하면서 더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악을 듣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별난 사람들도 스치게 되고, 세상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온갖 사람들이 다 있구나. 어렴풋이 그런 감을 잡게 된 것도 같아요.


시작은 음감회(음악감상회)였습니다. 홍대 인디 1세대 밴드들이 한창 땅밑을 달리고 있을 시기, 저와 친구들도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그 일대를 어슬렁거렸습니다. 일본 작가 우치다 타츠루의 책에 보면 뭔가 변하고 있는 어떤 공간에는 독특한 내음이 있어서 그걸 알아보고 사람들이 몰린다는 얘기가 슬쩍 나와있는데, 그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그때를 떠올렸어요. 말로는 잘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런 공기가 있습니다.


당시 'sub'라는 음악잡지 귀퉁이에 난 음감회 회원 모집광고를 보고 면접까지 봐서 들어간 그곳. (모임에 면접이라니... 면접 기준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떨어져서 돌아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조금 웃긴 일이죠:) 영국의 클럽문화를 경험하고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어야 한다며 세 명의 언니들이 문을 연 라이브 클럽이 있었어요. 평일에는 밴드 오디션, 주말 저녁에는 공연. 이렇게 운영을 하는데 저녁에 공연을 하니, 낮 시간에는 텅 비게 되죠. 일요일 오후, 그 빈 공간에 우리가 음반과 읽을거리들을 들고 모여들었습니다. 거기는 우리에게 음악으로 가는 '토끼굴' 같은 곳이었죠. 앨리스가 푹 빠졌던 구덩이처럼 우리도 일요일의 토끼굴에 기꺼이 스스로를 던졌습니다. 땅밑에서 주로 활동하던 클럽 주인 언니의 빛나는 투명한 피부는 언제나 미스터리였어요.


그 어두운 조명 아래서 유행하던 철학서들을 읽겠다고 들고 오는 애들도 있었고, 만화책을 달랑 들고 와서 땅콩을 씹으며 넘기는 애들도 있었죠. 언젠가 연필을 떨어뜨려서,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숙인 적이 있는데, 하나같이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고 있었습니다. 마룻바닥을 울리는 스니커즈 소리가 스피커 사운드에 묻혀서 몰랐던 거죠. 테이블 위에선 책장을 넘기면서요.


어떤 음악을 틀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습니다.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었어요. 일본 락, 독일의 아트락, 남미 음악, 클래식, 심지어 국악까지 흘러나왔지만, 역시 가장 많이 들은 건 당대의 얼터너티브, 모던 락이었습니다.

회원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하루씩 음반을 틀었고, 손으로 갈겨쓴 플레이리스트도 돌렸습니다. 두 어 시간 음악을 다 듣고 나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감상평을 하는 것이 순서였어요. 진지한 얘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쓸데없는 얘기였어요. 돌아보면, 취향에 대해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죠.

또, 회지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시네필들의 시기이기도 해서 영화, 대중음악을 비롯한 각종 비평들이 쏟아졌습니다. 만나면 늘 허튼 소리나 하던 선배들이 회지 속에서는 달랐습니다. 함부로 양보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이 그 글들에 있었죠.


그 모임의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친절'이라는 부담이 없었습니다. 규칙이 없다 해도 너무 없었던 것일까요? 이래야 한다는 것이 없었어요. 모임에 나오기를 권했지만 안 나온다고 해서 연락해서 오라고 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남들 떠들 때 조용히 있는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었고, 할 말이 있으면 알아서 떠들면 될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생이었지만, 일하는 선배들도 많았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어요. 먼저 말하기 전에는 모르는 채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슬슬 이 편이 편해지기 시작했어요.


결코 모범적인 모임은 아니었습니다. 사건 사고가 많았어요. 뮤지션과 사랑에 빠져 가출을 감행하는 호기로운 언니들도 있었고, 술 먹고 엉뚱한 곳에서 깨어나는 에피소드로 웃음을 주곤 했어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며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던 시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시간 낭비였을까요. 아마도 그럴지 모르죠.


그 이야기들, 시간들 속에 뮤지들의 음악이 스며있습니다. 책의 '27세 클럽을 넘어서' 꼭지에서도 썼지만, 수많은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우리는 만날 구실을 찾고, 공연을 보고 떠들곤 했습니다. 그 시간들이 사진첩이라면 페이지마다 음악이 들려오는 것처럼요.


여전히, 어슬렁거리는 것이 권할만한 취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 낭비 없는 촘촘한 시간표로 움직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어슬렁거릴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전해질 때가 있죠. 그런 친구들을 그냥 지나쳐버리지는 못 할 것 같네요.

거기에는 좀 이상한 세계가 있다고 해도요. 아직도 궁금하고 이상한 것들이 많아서 오늘도 어느 골목을 서성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음엔 이런 이야기들을 좀 써볼까 구상하고 있습니다.

어슬렁거리기를 좋아하는 슬래커(slacker)들의 주제가 같은 곡으로 마무리할게요.


Led zeppelin -dazed and confused

https://www.youtube.com/watch?v=w772GXG5LnE



혹시, 카페의 한 테이블 빌릴 정도의 소규모의 북토크나 산책 정보 등을 나누는 모임을 한다면 관심이 있는 분이 있으신가요? 정해진 것은 아니고요. 올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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