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he Book :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 #8
뭔가 달라지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작가 라고 하면 노트북 앞에 두고 원고 쓰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건 차라리 가장 쉬운 단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 오기 위해서 수 십 개의 테이프들을 프리뷰해야 합니다. 열 개 즈음 넘어가면 절로 비명이 납니다. 눈알 빠지겠다는 말이 농담처럼 다가오지 않죠.
시간이라도 넉넉하면 뭐 며칠을 두고 꼼꼼히 보면 여유롭겠지만, 그런 시간은 없다고 보면 맞아요. 늘 빠듯하고, 테이프는 넘쳐나고 그래서 밤들을 새고, 책상에서 잠들고, 후다닥 편집하고, 달리고... 그렇게 됩니다.
2010년대 즈음이었을까요. 유럽 촬영본을 보고 있는데 출연자들이 멋진 장소에 가면 그런 리액션을 합니다. "아, 여기 꼭 일산 호수공원 같다!"라든지, "그러니까 여기,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군" 이런 식이요.
브루클린에 가서 "음, 성수동인데?" 이런 얘기인 거죠.
그런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요. 농담이 섞인 것이었지만 여행이 워낙 대중화되었고, 한 도시에서 다양한 이국적 풍경들이 섞이다 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예전처럼, 엄청난 감탄사를 내뱉거나 그런 반응이 좀 구시대적이 되었다고 할까요.
또, 유럽에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다 보니, 연예인들이 길을 가면 알아봅니다.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의 해변에서도 그곳 사람들이 한국드라마 이름을 외치며 반가워합니다. K팝의 힘도 그렇죠. BTS를 꼭 말합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BTS가 그렇게 세계 무대를 휩쓸더라고요.
저 역시도 유럽의 도시 풍경들이 이상적 도시라고 여겼죠. 에어컨, 난방 불편해도 백 년, 몇 백 년도 지나온 유서 깊은 건물들 앞에서 좀 작아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곳 거주자가 아니라 잠깐 여행자로 지나서 그런 지는 몰라도 그건 사실이었어요.
또, 윗세대들 특히 독일이나 파리에서 유학했다는 지식인층들도 이런 유럽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TV에서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며 활동하던 어느 분도 '너희 나라엔 왜 백 년 넘은 건물이 없냐?'는 질문을 유럽에서 들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며 주춤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어떤 분은 독일 유학 시절을 말하다가 그들의 세련된 인종차별을 교묘하게 옹호하는 식으로 말씀을 하더라고요. 세련되면 인종차별이 아닌 건가, 뭐 그러면서 얘기들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역사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들도 그런데, 일반인들은 어떨까.
흔히 유럽에 가면 그들이 이룬 역사와 풍경에 감탄하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식민지 유물들을 보며 느꼈던 불편한 감정은 잘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멋진 패션과 개성들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지만 거리에서 불시에 당했던 인종차별의 경험도 굳이 꺼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만은 그런 경험이 없다는 것을 자랑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죠.
개인의 잘잘못이라기보다는 사실 뿌리 깊은 사회적 인식이죠. 유럽중심의 세계관. 그걸 깨기 위해서 <총, 균, 쇠>의 저자도 그렇게 두꺼운 분량의 증명이 필요했습니다. 지리적 이점과 환경으로 운 좋게 역사가 그들에게 이롭게 흘러간 것이지 결코 그들이 우월해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대개 우리는 유럽과의 비교에서 뭘 내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뭔가 주춤하게 되죠.
2023년도 BTS는, 스페인 기자에게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너희 K팝 스타들은 그렇게 고된 훈련을 받는다던데? 너무 빡세지 않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지?
매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상대를 염려하는 가벼운 질문이 아니라, 일단 기세를 꺾어버리고 싶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성공을 축하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아주 익숙한 방식이죠.
RM은 여기서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침략당하고 파괴되었고, 둘로 갈라진 나라입니다. 7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나라 지금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된 건가?
우리 국민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혹독하게 일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나 영국처럼 수 세기 동안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했던 나라의 사람이 저를 보고 '세상에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너무 압박해요, 한국에서의 삶은 너무 스트레스가 많네요!'라고 하죠.
그래요. 우린 그렇게 목표를 달성해 왔거든요. 그리고 이 방식이 K팝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드는 점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부작용도 있겠죠. 빠르고 급박하게 진행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요."
- 2023.3.13 RM's interview with EL PAÍS (Spanish newspaper) 중에서
여기서 K-pop 시스템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물론 부작용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궁금해집니다. RM은 어떻게 이렇게 답할 수 있었을까요?
소속사의 교육도 있었겠지만, 그의 평소 행보를 보면 워낙 문화예술을 비롯해서 다방면에서 공부를 많이 하며 생각을 다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세계 무대에 직접 서 보고, 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세계적 스타들과 이야기도 해보고 시상식에 함께 하면서, 해보니까 크게 빠질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지요. 이 경험만큼은 공부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식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또 경험만으로도 아니죠.
책에서 저도 우리 도시의 못생김을 감추고 싶은 감정을 슬쩍 썼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모습이 다 재밌고 새롭게 보이는 시각을 갖자는 얘기는 아니고, 무조건 부정적이기보다는 좀 달리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은 들었습니다.
물론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있다.'라고 했던 정기용 선생의 메시지를 기억하면서요. 새로운 세대가 일으키는 바람을 함께 맞아야죠.
오늘은 RM의 노래로 마무리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8wI5ZosdRA
사랑과 미움이 같은 말이면,
I love you Seoul
사랑과 미움이 같은 말이면,
I hate you Seoul
-Seoul 중에서, 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