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즈의 시대를 듣는 법

After the Book :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 #7

by 베리티

좁은 방이라고 해도 책이 놓여있으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이런 문장을 읽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책 속에 이미 큰 세계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책이 있는 장소들은 답답하지 않다는 얘기였는데요. 바로 생각나는 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입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여주인공 조제는 나가지 못하니 온종일 집에 처박혀 있습니다. 작은 일본식 집에 하루 종일 머무는데, 조제는 언제나 책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할머니가 분리수거장에서 가져온 헌 책들이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세계가 됩니다. 금발을 뒤집어쓰고 낡은 책장을 넘기는 장애인 소녀 조제는 불행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신비스럽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common (1).jpg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중에서

책과 비슷하게 그 공간을 신비스럽게 해주는 것으로 레코드판이 떠오릅니다. 단 몇 장이라도 바이닐 앨범이 보이면 어디 홀린 것처럼 그곳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언젠가 한낮에 동네를 지나다가 유리 통창 너머로 커다란 오디오 아래 레코드판들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눈여겨봐 두었다가 일을 미친 듯이 마감하고 겨우, 그곳으로 책 한 권을 들고 갔어요. 늘 북적이고 자리가 없던 카페였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없었어요.


스피커 가까운 자리에서 음악 들으며 책을 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카페 주인도 심심했는지 말을 걸더라고요. 여기 앨범 중에서 듣고 싶은 것을 고르면 틀어주겠다는 거였어요. 단 한 사람을 위한 선곡? 비슷하게 되었어요. LP 바에서 가끔 신청곡을 요청할 때는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고르라고 요청받는 경우는 없어서 신나게 골랐습니다. 이상하게 손님들이 오지 않아서, 카페 주인과 약간의 수다를 나누던 기억이 있습니다.


레코드판의 경우 앨범의 커버가 하나의 미술작품이 됩니다. 2024년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힙노시스 :LP커버의 전설>에서 디자이너 스톰 소거슨(Storm Thorgersom)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앨범 커버는 가난한 자의 미술관이다."

(The album cover is the poor man's art gallary)


아마도 스윙잉런던(1950~60) 시기가 최고조였을 것 같은데요. 앨범 커버들에 유명 미술가들, 디자이너들의 손길이 닿아 명작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갤러리에서 사서 소장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겐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앨범 한 장 산다면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얘기를 하자면 또 길어지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저의 책에 나왔던 The Good The Bad and The Queen(TGTB&TQ)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The Good The Bad and The Queen의 데뷔 앨범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앨범은 아주 저평가된 걸작입니다. 아트워크 얘기로 시작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이 좋습니다. 밴드 이름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있을 텐데, 1966년 작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 영화 <황야의 무법자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못생긴 놈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에서 따온 것입니다. 영국 밴드이기 때문에 'The Queen'을 넣었어요.


혹시 이 앨범을 발견하시면 무조건 사시길 추천부터 드리고요.

우선 곡을 들어보면서 계속 이어갈까요.


The Good The Bad and The Queen - Herculean

https://www.youtube.com/watch?v=-ecbXK-3UaY&list=OLAK5uy_mrTjFdlztf2F1893p0tBO3CtUn2-OzYbY&index=5


저는 '여왕'이라는 타이틀과 영국, 그리고 불타는 도시와 사람들이 주는 이미지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 배경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뾰족한 성들은 높이 솟아있는데 그늘진 외곽에 몰려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와 불타올라서 암흑 같은 하늘이 어떤 우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외 자세한 이야기는 제 책 - 빅토리아 시대, 밤의 동행자들 꼭지에 썼습니다.)


앨범 커버도 그런데 음악도 딱 들어맞습니다. 이 음반이 나온 연도가 2008년인데, 당시 주류 록음악들과 한참 떨어져 있는 음악을 합니다. 밴드 멤버들은 중절모를 쓰고 악기를 연주합니다.

사실 이 밴드는 blur의 데이먼 알반의 프로젝트입니다. 젊음의 열기에서 비켜나 한창 중년으로 넘어갈 즈음, 그가 중후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죠. 모두가 어려 보이려고 바둥거리거나 나이 듦의 흔적을 감추기 급급할 때 아주 여유롭게 신사의 자리에 먼저 가 있었습니다. 물론 (미모를) '가진 자의 여유'라는 걸 알지만, 그는 어워드에서 트로피를 거머쥐던 젊은 시절에도 화려하게 입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예측을 비껴가는 그의 행보에 팬들은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음악은?

그의 음악은 언제나 timeless입니다.


여기서 더 열광하다가는 팬심으로 치우칠까 염려되어 이 정도로만 해야겠어요. 아무튼 데이먼 알반. 그 이름을 기억하시면 인생에 큰 도움이 됩니다. (유튜브 댓글에 그를 만난 건 내 인생 최대 행운이라는 댓글이 있는데, 그거 보고 제가 쓴 줄 알았어요.) 다시 앨범 아트워크 얘기로 갈게요.


이 고풍스러운 도시 풍경화는 19세기 영국 화가 토머스 쇼터 보이즈(Tomas Shotter Boys)의 작품입니다. 런던 풍경을 세밀하게 기록했던 화가인데 런던이라는 도시의 우울과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 이 앨범의 커버로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또 밴드 멤버 중에는 전설적인 펑크록 밴드 Clash의 베이시스트가 있어요. 19세기 클래식한 기록화와 현대 펑크 씬의 거장들이 만난 '날 것의 감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찰스 디킨즈의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화려한 자본주의의 이면 뒤에 가려진 가난한 인물들을 그립니다. 이 앨범 커버 자체가 현대 런던의 어두운 초상과 제국주의의 유산,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어서 '시간을 초월한 도시의 우울이라는 강력한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산업혁명 이후 쉴 새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비정한 사회 언저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커다란 두 눈. 올리버 트위스트의 눈동자가 떠오르는 음악들입니다.


음악으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가늠해 보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클래식 음악가들의 악보들이 그걸 말해주지요. 훌륭한 지휘자, 연주자들, 길이길이 남을 역사적 명반들. 아마도 '명예의 전당' 같은 수식이 어울리는 자리겠죠. 저 역시도 그 음악들을 좋아합니다. 빛나는 무대를 향해 박수를 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방식이 있어요.

잘 보이지 않는 도시의, 이름 없는 동네의 작은 클럽에서도 그런 일들은 벌어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찰스 디킨즈가 산책하던 런던의 뒷골목을 내 방으로 들여올 수 있습니다.

같은 곡이지만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버전을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Sj0dkqBiWc

(건반 연주자가 데이먼 알반입니다. 라이브 버전에서만 들을 수 있는 후반부의 건반 애들립을 특히 좋아합니다.)



*저의 책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가 오디오북 [KBS x 알라딘 최고의 클립]으로 제작됩니다. 지금 원고를 정리하면 3월에는 클립이 나올 듯 합니다! 완성되는 대로 소식 전하겠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사는 서울도, 사울 레이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