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신흥시장 테라스에서
홍대가 이젠 예전 같지 않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거리 어딘가의 못생긴 골목을. 어디에 가도 다를 것 없는 유흥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노골적인 간판과 현란함으로 휘청거리는 술집들을. 밤이면 그곳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도.
좋아하던 가게들이 많이 사라지거나 이사했다.
언제나 다른 꿈을 꾸었다. 오르한 파묵은 언제나 이스탄불 어딘가에 자신과 비슷한 오르한이 있을 거라 상상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예전에 좋아하던 홍대 같은 곳을 찾아다니곤 했다. 어디든 비슷한 곳이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기를 좋아했다.
일요일 오후, 우리는 마을버스를 탔다. 차는 두고 온다. 휴일인 데다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 어차피 계속 걸을 것이다. 이번 모임의 목적은 사실 그거다. 교통이 불편해서 잘 못 갔던 동네를 한번 둘러보는 것.
막상, 한낮의 마을버스가 이렇게 붐빌 줄은 몰랐다. 손잡이를 붙들고 휘청이고 있을 때 즈음 톡이 울린다.
-해방촌 갈 거 같은 애들이 많이 타는 마을버스로.
-주민들 합세 마을버스 미어터짐.
-무슨 오거리가 이게 다야?
-읍내구나.
해방촌오거리는 단출했다. 마을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친구들이 보인다. 마을버스에서는 놀러 온 옷차림의 아이들이 연달아 내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오래된 전봇대와 늘어지고 겹치는 전선들이 머리 위를 지나간다. 안테나와 전선이 엉킨 풍경이 옛 사진첩처럼 다가온다. 여러 갈래로 뻗은 언덕길은 좁고 남산타워가 잘 보인다. 멀리 뾰족한 첨탑이 있는 교회도 솟아있다. 해방촌의 첫인상이다.
신흥시장 쪽으로 걸어가니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 입구에 들어서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북적였다. 역시 전봇대 옆에 ‘신흥시장’이라고 쓴 궁서체 간판이 보인다.
하얀 철제 기둥이 곳곳마다 보였다. 머리 위에는 롤러코스터 철로 같은 하얀 기둥들이 지붕을 이룬다. 내부 빨간 벽돌 건물이 둥근 형태로 이어지고, 중앙에도 건물이 있는데 그 사이를 하얀 철제 기둥으로 세우고 지붕을 얹어 꽤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재래시장에 이렇게 투명한 지붕을 얹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바뀐다는 것이 신기하다. 슬레이트가 여기저기 얹어져서 어둠침침하던 지붕을 걷어내면서 투명한 공기들이 시장을 가득 채운다. 옛 한글 간판과 이국적 깃발이며 외국어 간판들이 함께 있어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태원 비슷하지만, 더 아기자기하고 동네 같은 느낌이다. 유럽에서 들렀던 마켓 이미지들. 런던 쇼디치 근처에 있던 스피탈필즈 마켓(Spitalfields Market)이 떠올랐다. 17세기 빅토리아 시대 벽돌 건물을 유리와 철제 기둥이 떠받치고 있던 분위기와 비슷하게 다가왔다. 물론, 규모는 훨씬 작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생동감이 넘치고 활력이 있어서 좋았다.
내부가 계속 돌 수 있도록 되어있다. 두 어 바퀴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커피집 앞에서 멈추었다.
미닫이문을 알루미늄 재질로 만들었는데, 유리창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입구가 여기가 맞나 주춤했는데, 미닫이문 너머로 보이는 내부가 좁았다. 테이블도 없고. 그런데 카페 중앙엔 나선형 계단이 빙빙 돌아가며 3층까지 이어졌다. 예전의 가게를 개조한 것 같았는데. 그 빙빙 도는 계단이 신기해서 이 카페를 골랐다. 웨이팅이 두 팀 정도 있었는데, 카페 앞에서 떠들면서 기다렸다. 밤색 후드 티, 단발머리에 눈이 큰 귀여운 알바생이 자리 났다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산미가 있는 커피를 주문하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아주 좁은 나선형 계단이라 조금 오르다 보니 좀 어지러웠다. 2층을 지나, 3층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탁 트인 옥상이었다. 난간 쪽 테이블에 자리 잡았는데, 아래로 보이는 풍경들이 재밌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듯한 거리감. 건물 사이 간격이 아주 좁다 보니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보기 드문 좁은 공간. 알다시피 해방촌은 1945년 광복 이후 돌아온 사람들, 또 전쟁 이후 실향민들이 모여 살면서 생긴 동네다. 남산 기슭 버려진 땅에 무허가 집들을 짓고 살며 만들어졌다. 그 시절 좁게 살 수밖에 없던 상황들이 동네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신흥시장의 건물들이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 역시 그런 이유이다. 도시정비나 계획이 들어올 새가 없이, 생존을 위해서 건물을 짓고 올렸다. 그 시절의 삶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오래된 생명력이 전해진다. 이 땅이 새롭게 리모델링되고 사람을 불러 모으게 된 것은 그 생명력 때문은 아닌가.
커피 마시며 떠들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친구들과 신흥시장에 오기로 한 건 몇 년 전의 일인데, 미루다가 이제야 온 것이다. 그 사이 이렇게 달라졌을 줄 몰랐다.
이 시장이 독특한 건 맨 아래 1층은 가게이고, 2,3층은 일반 주택 같아서 오래된 주상복합 건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2층에 뭐가 있을까?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던 빨간 벽돌 아파트가 떠오른다. 창가에 걸터앉아 홀리(오드리 햅번)가 기타를 치며 'moon river'를 부를 때, 이웃들은 창을 열고 그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비상계단. 같은 아파트에 서는 무명작가 폴은 아파트의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웃의 방에 찾아왔다. 무명작가와 배우지망생 같은 이방인들이 살던 뉴욕 어퍼 이스트사이드. 그곳 사람들은 너무 좁은 공간 사이에 사는 까닭에 서로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모른 척해주는 예의를 익혔다.
홀리가 쏟아지는 빗길에서 고양이를 발견하고 안아 올리던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하지 않는 거야. 우리는 그냥 만난 것뿐이야. 이름 없는 고양이처럼 말이야. 난 누구에게도 속하고 싶지 않아."
우리는 어떤 면에서 홀리처럼 고양이 뒤에 숨은 이방인 같았다. 이방인으로 떠돌아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던 길. 누구든 환영해 줄 준비가 되어있는 문들이 이어지던 거리.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많아서 주는 설명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있었다. 조금 달라도, 괜찮다는 말없는 위로들이 그 거리엔 늘 넘실거렸다. 어느 문을 열어도, 우리는 그냥 만난 것뿐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시간들. 지나치게 깊이 바다에 푹 빠져들기보다는 잠깐의 물결처럼 기억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머물 수는 없었다. 이제는 나만을 위해 열린 문을 향해 나가야 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홀리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홀리는 고양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시간이 오고 있었다.
toe -sunshine will shine
https://www.youtube.com/watch?v=ZcS6ix-cIY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