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의 카카오를 마시는 밤

삼청동 바라캇 서울에서

by 베리티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가 한창이다.


휴일의 삼청동은 이미 길에서부터 사람들로 붐빈다. 현수막을 한번 보고 유유히 지나쳤다. 아마도 평일 오전에 다시 들러야 할 것 같다. 그 인파 속에서 뭘 제대로 보기는 어려울 듯.


조금 더 걸으면 가볼 만한 곳이 하나 있다. 근처 가게인 이솝(Aesop) 비누 향기가 번져오고, 마당엔 다채로운 컬러의 페인팅으로 뒤범벅된 클래식한 포드 자동차가 한 대 서 있다. 이 차의 주인 파에즈 바라캇(Fayez Barakat)의 갤러리, 바라캇서울이다. 바라캇 가문은 150년간 5대째 내려오는 유물 수집가 집안인데, 작가로도 활동하며 런던, LA, 홍콩, 서울에 갤러리를 두었다.

전시관은 두 곳인데,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바라캇 컨템포러리와 고대 유물을 전시하는 바라캇 서울이 있다. 여기는 유물이 있는 바라캇 서울. 묵직한 톤의 고전적인 석조 건물에 바라캇이라는 큰 글자가 눈에 띈다.


마당에는 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벚꽃 아래 환한 웃음이 번진다. 다들 사진만 찍고는 가던 길을 간다. 휴일이라 여기도 붐빌 거라 예상했는데, 혹시 여유로운 가. 기웃대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구경해도 되죠?

데스크에 앉은 갤러리스트가 그렇다고 인사를 한다. 의외로 사람이 없다. 내부는 그리 크지 않은데, 진열대에 유물들이 가득하다. 천천히 유물을 보고 있자니, 몇몇 사람들이 들어와 사진을 찍다가 제지당한다. 사진은 금지되어 있어요. 휙 둘러보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어떤 항아리 앞에서 멈춘다.

테라코타의 거친 질감 위로 드러난 시에나 색감. 표면에 그려진 선에는 상형문자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긴 원통형의 그릇.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아서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다. 흙의 입자들이 긴 시간 불의 시간을 거쳐서 도달한 붉은빛. 날개를 드리운 인물인지 신인지 알 수 없는 대상이 보인다. 세월을 거쳐 약간 바랜듯한 느낌이 미스터리한 신비감을 준다. 한참 보고 있으려니, 갤러리스트 목소리가 들려온다.


설명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작품을 살 것도 아니면서 도슨트 요청을 하기가 애매해 망설이는데 귀신같이 알고 다가온다. 유물이 있는 공간은 어딘가 신비로운 면이 있다. 이 항아리가 궁금하네요.


300~400년대 마야인들이 카카오를 마시던 실린더. 정식명칭은 마야 카카오 실린더(Maya Cacao Cylinder).

요즘으로 치면 다크초콜릿이죠. 지금처럼 많이 가공되지 않은 초콜릿 음료를 담았던 그릇이죠.

마야인들은 카카오빈을 갈아 물과 고추, 향신료를 섞어 거품 내어 마셨다. 설탕과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카카오 본연의 맛. 테라코타 질감 안에 가공되지 않은 씁쓸하고도 짙은 풍미가 담겼다.


카카오?

혹시 다크초콜릿을 좋아하는 기호가 이 실린더 앞에 오래 머물게 한 것인가. 미스터리가 한 단계 깊어진다.

카카오를 담는 그릇조차 대강 만들 수 없어서, 마야인들은 정성을 쏟았다. 그들에게 카카오는 가장 귀한 것이어서 화폐로도 쓰고, 신의 제물로도 바쳤다. 그들만의 원초적 생명력이 담긴 신들의 음료는 그렇게 실린더에 담겼다.


염원을 담아 새겨놓은 실린더에서 밤처럼 짙은 카카오음료가 실린더에서 쏟아진다. 쓰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단맛은 없다. 얄팍한 달콤함에 속지 않았다. 그렇게 망각을 마시고 슬픔을 삼켰다. 밤보다 더 깊은 맛 속에서 시름을 잠시 덜었다. 묵직하고 짙은 카카오향 속에 이따금씩 반짝이는 별을 맛보았을까. 혹은,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고 싶었을 지도.

카카오는 바닥났어도 그 신비와 시간을 간직하려는 손길이 테라코타 위에 남아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소중한 것을 말하고 싶었던 장인의 태도는 사라지지 않고 새겨진다.


숫자 감각에 앞섰던 마야인은 아라비아숫자보다 훨씬 이전에 먼저 0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아무것도 없음'을 숫자로 환산할 줄 알았고, 시간을 비선형으로 인식하여 순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미래라고 믿었다. 죽지 않고 순환하는 시간을 기렸다. 그 시간은 돌고 돌아, 다크 초콜릿을 좋아하는 먼 미래의 어느 관람객 앞에 도착했다.

벚꽃이 한창 날리던 휴일의 한낮, 바라캇서울의 오후에.


문명은 사라지고 하나의 그릇으로 남았다.

어디선가 아득하고 가냘픈 베이스기타 소리가 들려온다.



서태지 -Maya

https://www.youtube.com/watch?v=4lXw1-bPmPM&list=PLccMoMwcwA4LevGGvxfOjhProV5v9nCNR&index=1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찍지 못하고, 나중에 찾아보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비슷한 마야 카카오 실린더가 있다(왼쪽 사진의 실린더와 비슷. 그런데 이것보다 바라칸의 유물이 더 세련되었다.)

https://www.metmuseum.org/ko/perspectives/maya-drinking-c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