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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아서

<나의 해방일지>와 박해영 작가

by 베리티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좋아한다. 나뿐이 아닐 것이다. 내 주위의 꽤 많은 친구들이 이 드라마를 말하곤 한다.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작품이 있는 것이다. 이 작가라면 어떤 작품을 내놓아도 무조건 예약. 나의 경우는 앨범만 낸다면 무조건 사는 뮤지션이 몇몇 있는데, 드라마에선 박해영 작가가 그렇다.


<나의 아저씨>에 대해서는 할 말들이 차고 넘치지만, 한 가지만 하자면 이런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내의 불륜으로 고통받을 때,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

동훈(이선균)이 아내의 바람으로 괴로워할 때, 그를 좋아하는 이지안(아이유)이 도청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면서 운다. 이건 도대체 어느 별의 이야기인가. 뻔한 이야기라면 내가 좋아하는 상대의 연인과의 불화를 내심 기대하거나 박수만 안 쳐도 다행일 일이다. 누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그렇다. 그렇지만, 세계는 발견된다. 세상에는 모두가 말하는 한 가지의 사랑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박해영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런 관계가 발견되고 말해진다. 내가 가졌던 생각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해방일지>를 3회까지 볼 때만 해도 친구에게 말했다. "글쎄, 아직 모르겠어."

미스터리 한 외지의 인물, 구 씨. 한 번도 채워진 삶인 적이 없었다는 미정, 직장생활의 권태 속에 그저 그렇고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딱히 잘난 것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그토록 열정을 가질만한 목표가 있기나 할까. 해방이니 추앙이니,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말만 맴돌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


어떤 작품은 기다림만큼, 아니 그 이상의 보상을 준다. 작품 초반에 낚아챌만한 재미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대중예술의 불문율이지만, 훌륭한 작품들은 언제나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건 초반의 흥미로운 설정에 붙들려서 계속 보게 되는 작품의 재미와는 비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이다. 그것이 법칙은 아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설레기 시작한 것은 4회, 구 씨의 철길 멀리뛰기 씬이었다. 말도 없고 알코올 중독자에 가까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밭일을 마치고 잠깐 쉬고 있을 때 미정의 모자가 바람에 실려 철길 너머로 날아간다. 거리가 멀어서 한참 돌아가야 하는 상황, 갑자기 구 씨가 뒷걸음친다. 어딜 가는 거지?

그건 전진을 위한 후퇴였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충분한 워밍업, 그리고 도약.

숨이 멎는다.


이런 전개는 익숙하지 않다. 밭일하다가 난데없이 멀리뛰기라니. 온갖 상상을 다 해보았지만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다. 그 순간부터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기다림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설렘의 시작.

박해영 작가의 인물들은 늘 똘끼가 있다고 느껴왔다. 이번에도 그렇다. 그래서 좋다. 이야기가 예상을 벗어날 때마다 느껴지는 통쾌함이 있다. 그가 말하는 '해방'이란 것이 이런 것일지도.


<나의 해방일지>는 서사가 강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드라마는 술 먹는 장면이 많은데, 술 먹었을 때나 할 수 있는 조금은 비일상적인 대화들의 맛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구 씨는 술 먹으면 조금은 착해져서 소주가 아닌 아이스크림을 사 온다. 어느 편엔가 나왔던 대사처럼, 세상을 멀쩡하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는 술을 마셔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더 정상인 것 같다고. 이따금씩 그런 생각들 하지 않을까.


지난 12회에서는 구 씨와 창희의 논두렁 레이스 씬으로 웃게 하더니, 바로 구 씨와 미정의 이별을 보여주었다. 구 씨의 롤스로이스에 흠집을 내고 쫄아있는 창희. 그리고 이를 알게 된 구 씨. 평소의 구 씨라면 대수롭게 넘기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시원하게 배반하고 두 사람은 달린다. 추격한다. 동네 친구는 물병을 전해주며 이들을 돕는다.(이 장면 때문에 너무 웃었다. 이런 식의 전개가 묘하게 끌린다) 한없는 육체의 피로감 속에서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 두 사람을 붙든다. 그대로 지하철을 타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무언가를 결정한다. 삶에서 마냥 즐겁기만 한 순간은 없다.


구 씨는 결심한다. 미정을 더 이상 자신과 엮어서 위험하게 할 수 없다. 떠나겠다는 선포. 짐작을 하고 있었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울에 가서 너도 평범하게 살라고 하는 구 씨에게 미정은 자신은 이미 평범하다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평범이라는 건.... 같은 욕망을 가질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박해영 작가 드라마의 대사다. 이런 것이다.


동창회나 동문회 나가면 환영받을만한 잘나고 멋진 인물들이 넘쳐나는 드라마 속에서 <나의 해방일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고도 사랑은 시작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찬란함이 아닌 사람 속 깊은 내면에서 저항할 수 없이 올라오는 본능적인 끌림.


오랫동안 잊혀왔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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