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네가 사는 방식으로 살 수 없어
머리 위로 한낮의 여름 열기가 꽂히던 날, 친구의 차에 올랐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근황을 묻다 보니 회사 생활의 어려움, 조직의 불합리함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도 더 이상 어리지 않다. 사회초년생 시절엔 목소리를 높여서 탓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만도 없다.
때때로 생각한다. 나는 인내심을 과소평가해왔던 것일까. 머리로 잘 이해되지 않아도 견뎌야 하고 버텨야 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했나.
그때에 내가 좀 더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한다. 사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는 좀 아래다. 왜 화가 나는지 이해하지만 이제는 조금 참아보라고 말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내 얘기를 덧붙였다. 나도 조직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화를 내고, 윗사람에게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던 일들이 있었으니까. 사실 잘 한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조금 참아. 그러다 보면 깨달음이 오나 봐.' 잘 견뎌낸 사람들의 얘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친구가 지지 않고 나선다.
"그 느낌은 알기 싫은데?"
차는 골목으로 막 접어들고 있었다. 친구는 코너링을 하면서 덧붙였다."언니가 그럴만했으니까 그랬겠죠!"
뜻밖의 반론에 잠시 멍해졌다.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잘못된 일에 저항했을 때 주변에 이야기하면, 꼭 그렇게 말은 안 해도 네가 과민한 거 아니냐는 뉘앙스가 늘 느껴졌다. 남들도 다 그런 거 참고 지내는데, 굳이 꼭 그럴 필요 있느냐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아도, 그렇게까지 해봤자 바뀌는 건 없고 너만 손해지. 그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 말풍선처럼 머리 위에 떠있는 느낌.
지금의 나이가 되면 어느 모로 보나 어른이 될 줄 알았건만, 여전히 타협이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나는 조직생활을 쭉 하던 사람도 아니지만,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종종 그런 일들을 마주친다. 최근에도 제작사 대표와 불편한 말들이 오갔다. 모른 척 넘어갈까 굳이 귀찮게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할까 생각 안 한 것도 아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일이 잘 해결되었지만, 일을 안 하면 안 했지 다음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진이 빠졌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 것도 같다. 그러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에게 어떤 사람들이 필요한지 갑자기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하는 것이 정말 정답일까. 나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도 남들 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후회 없을까.
레이 브래드버리라는 작가가 있다. SF소설의 전설이라고 하는데, 우연히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가 독보적인 그의 문체에 반해버렸다.
그는 아홉 살에 함정에 빠졌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같은 반 친구들의 비난에 못 이겨 자신이 좋아하던 벅 로저스 만화책을 찢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달 후, '그 친구들이 모두 바보'인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다시 만화 수집을 시작했다.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지 그때 자신의 능력에 놀라곤 한다는 고백이다.
친구들의 압박에 굴복하는 게 익숙한 나이에, 저항하고 인생을 바꾸고 홀로 살아갈 용기를 과연 자신은 어디서 찾았을까?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나의 사랑이자 나의 영웅 나의 삶이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단짝 친구, 삶의 중심과도 같은 그 친구가 물에 빠지거나 총에 맞아 죽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죽은 친구는 장례식에서 되살릴 수없다. 그렇지만 벅 로저스는, 내가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두 번째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입에 숨을 불어넣었고, 와우! 그가 깨어나 내게 말했다. 뭐라고 했냐고?
"소리쳐. 벌떡 일어나, 뛰어, 그 개자식들을 뛰어넘어. 그 녀석들은 절대로 네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 못할 거야, 어서 해"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뿐인 삶을 살아야 한다.
-레이 브래드버리, <Zen in the art if writing> 중에서
내가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은 한 가지였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삶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말처럼 그들은 절대로 내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 그것을 살아야한다. 모두가 나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물살에 휩쓸릴 때 그게 무엇인지 말해줄 누군가는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만남의 시작에 대한 서툰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