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를 보면서 생각한 것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때로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난다. 그런 과정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도 있었지만, 점점 기대하게 된다. 팀 작업의 즐거움은 '나와는 다르지만 어쩐지 끌리는' 생각들을 마주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물론 비슷한 생각, 비슷한 취향의 익숙한 사람들과의 만남도 편하고 소중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어딘가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순간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어떤 과정을 지나왔길래 그런 말들을 하는 걸까.
얼마 전 녹화를 하다가,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그런 말을 했다.
"욕망에 대해 순수한 사람이잖아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토크 중이었다.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인 개츠비. 아나운서는 그 캐릭터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을 비치면서도 그 얘기를 꺼냈다. 카메라 뒤에 앉아 '좋은 표현이다'라고 속으로 외치는 순간, 같이 있던 전문가가 그 말을 받는다. "방금 멋진 표현을 해주셨는데요."
이런 수순으로 토크가 진행되면 그다음은 알아서 굴러간다. 걱정할 것이 없다.
언젠가 지인들과 함께 모여 수다 떨던 날. 누군가 말했다. "우리 너무 욕망이 없는 거 아니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그 화려한 셀럽들, 난다 긴다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건가.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건가. 혹은 숨기는 건가.
"그건 아닌 거 같아.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야. 욕망은 그 사람들하고 다를 수는 있어도. 그 질문은 좀 별론데?"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미디어 종사자들이라면 수많은 '욕망의 화신'들을 만나게 된다.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이 업종은 특히나 그게 자연스럽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감추고,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것이다.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어떤 명성과 지위를 얻었느냐가 섭외의 기준이 되고 계속해서 그런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내로라하는 셀럽들이 TV에 나와서 자신의 욕망을 밉게 보이지 않게 포장한다. 소박하고 검소한 셀럽? 그런 것들은 대부분은 이벤트인 경우가 많고, 그 역시 하나의 포장일 때가 많다. 물론 진짜 그런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유명세라는 것에 길들여지게 되면, 좀처럼 겸손하거나 검소한 생활을 하기는 어렵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꾸준히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셀럽이라면 그 사람에겐 진짜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다. (물론 그런 사람들조차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욕망. 늘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던 단어이면서도 꽤 오래 이를 외면해왔다. 그 화려한 셀럽들에 비하면 그 주변의 우리는 대단치 않아 보였다. 요즘은 소셜미디어만 가까이 해도 쉽게 느끼는 감정 아닌가. 그런데, 욕망에 대해 순수하다는 건 어떤 것인가?
TV 쇼에서 종종 드러나는 셀럽들의 토크들. 예전에 '청담동 살아요'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부촌에 살면서 전화받으며 '평창동입니다'라고 말하는 엣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삶. 그에 대한 동경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
굳이 셀럽이 아니어도,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마주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은 서울 테헤란로야" 가까운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빌딩 숲이 늘어선 대로를 운전하며 다니는 커리어우먼. 그녀의 욕망은 그런 것이었다.
"난 서촌이 나와 어울리는 동네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청담동이 맞더라고요. 이제는 저도 욕망을 드러내 보려고요." 어느 출연자는 점심 식사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예전에는 당황하기도 했었다. 방송을 함께 하며 스태프들과 콩나물국밥을 즐기던 그렇게 소박해 보이던 어느 전문가가 알고 보니, 강남에 빌딩을 몇 채 가진 건물주였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묘한 배신감을 느끼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뭐가 달라졌을까. 지금은 다시 묻는다. 그렇게 욕망을 드러내는 게 나쁜 건가? 어떤 면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용기가 아닌가? 남들이 속물이라고 보든 어떻든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는 것은.
더 별로인 것은 '아닌 척'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욕망하면서도 자기는 그런 사람 아닌 척. 이따금씩 돈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 뒤로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 소식을 듣는다. "저는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건물 몇 채씩 사놓고 그러는 사람들 말이다. 이제는 그런 말을 굳이 꺼내는 사람들을 달리 보게 된다. 차라리 돈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낫다 싶지만, 그것도 과하면 또 멋없다.
다시 생각해보니 청담동 살고 싶다던 그 건물주도 우리가 굳이 묻지 않은 거였지, 그가 검소한 척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욕망에 대해 순수하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닐까. <위대한 개츠비>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순수했다. 비록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를 쫒았지만 그 더러움을 다 감당하면서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그 삶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예스라는 답할 수 있는 삶을 모두가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사람은 모순적인 존재이고, 그런 본성을 타고난다. 개츠비가 살았던 재즈시대의 가치 있는 삶이란 그런 물질주의에 치우친 것이었고, 그 소설은 그 시대와 인물을 보여준 것이다. 개츠비는 사랑하는 데이지를 위해 성공을 위해 달렸고 목숨까지도 바쳤지만, 그건 그의 욕망에 충실한 삶이었고 그 결과를 감당했다. 비록 데이지는 개츠비의 장례식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여자였지만.
그렇다고 욕망이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삶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지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을 땐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고전을 읽는 것이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얘기해볼 일이다. 나와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