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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님 Dec 09. 2021

나를 용서할 수 없는 나에게 | 뮤지컬 <웨딩플레이어>

언젠가 나도 유지원처럼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 뮤지컬 <웨딩 플레이어>의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람 전 조금의 스포도 원치 않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학예회 때 우리 반은 도깨비가 등장하는 연극을 준비했다. 나는 도깨비 역을 맡아 얼굴에 까맣고 하얀 분장을 했다. 연극이 끝나고는 나의 단독 무대가 있었다. 4절지에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구연동화를 선보이는 것이었다. 그림 뒷면에 장면별 대본을 써 붙이고 한 장씩 넘기며 읽으면 됐다. 연극을 무사히 치르고, 구연동화 시간이 시작됐다. 순서에 맞게 대본을 붙인다고 붙였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림을 넘기는데 내 기억과 다른 대본이 나타났다. 나는 당황했다. 


여덟 살짜리 아이는 자기 몸보다 큰 4절지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다 울었다. 친구들과 학부모님들, 선생님들 앞에서. 아마도 선생님이 나를 무대에서 데리고 내려왔고 엄마 아빠가 진정시켜줬으며, 울음을 어느 정도 그친 뒤 다시 하겠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실수를 또 할 것 같았고, 그래서 다시 실패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레드앤블루 제공

이 낡고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최근에 본 뮤지컬 <웨딩 플레이어>때문이다. <웨딩플레이어>의 주인공이자 피아니스트인 유지원은 중학생 때 참가한 콩쿠르에서 자기 앞 순서였던 같은 학교 피아노 1등 친구의 연주를 듣다 도망쳐버린 경험이 있다고 고백한다. 전교 1등의 완벽한 연주를 듣는 순간 자신은 졌다고 느꼈고, 그래서 정말로 패배하기 전에 그만둔 것이라고. 연습에 들인 시간과 노력의 결과를 '실패'로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지원은 그날 이후 종종 악몽을 꾼다고 했다. 피아노 앞에서 도망치는 꿈이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쳐도 그는 결국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온다. 유지원은 아마 그때의 결정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후회하고, 그러지 말 걸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할 것이다. 


눈물 때문에 분장이 망가진 얼굴을 하고 다시 무대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던 어린 나를, 지금의 내가 안쓰러워하는 것처럼. 그러나 쉽게 포기하고 쉽게 울어버린 나를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


<웨딩 플레이어>는 피아니스트이자 부업으로 결혼식 반주 일을 하는 유지원이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대타 연주자를 구하면서 시작된다. 1인극이라 대타 연주자의 역할은 관객들의 몫이 된다. 무대 위의 유지원은 객석을 향해 말을 건넨다. 결혼식 연주곡 레퍼토리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됐던 이야기는 유지원이 결혼식 반주 일을 하게 되기까지 겪었던, 아주 사적인 이야기로 이어진다.


친구네 집 피아노를 부러워하며 멜로디언으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습한 일, 아빠가 아끼던 전축을 팔아 피아노를 사준 일, 레슨비를 감당 못해 지도교수를 바꿨다가 수행평가를 망한 일, 마침내 대학까지 들어갔는데 한 번 늘어난 인대가 말썽을 부려 휴학을 반복해야 했던 일, 졸업연주회를 망친 일. 


너무나 사랑했던 피아노가 꼴도 보기 싫은 가구처럼 느껴진 일, 그런데 이 피아노 한 대 때문에 아빠가 포기해야 했던 전축이 생각나 갖다 버릴 수도 없었던 일, 치자꽃을 들고 와 '피아노 치자'고 말하는 아빠가 지긋지긋해 소리를 지른 일.


그런데도 '피아노 치는 네 모습은 정말 반짝인단다'는 아빠에 결국 무너져 버린 일.


유지원의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은, 객석으로 날아와 곧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비록 초등학교 때 잠깐 말고 피아노를 친 적도 없지만. 대신에,


초등학교 때 아빠가 일하던 성당에서 얻어 온 중고 전자피아노에 마음을 빼앗긴 기억, 교외 사생대회에서 열심히 그린 그림을 냈더니 '이건 어른이 도와줬을 것'이라며 수상에서 배제돼 종일 울었던 유치원 때의 기억, 하루 종일 글 쓰는 일을 하다 손목이 망가져 숟가락 드는 것도 힘겨워 절망했던 기억.


결국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고 그러다 내가 미워졌고 또 울었고 울지 않기 위해 병원을 다녀야 했고 약을 먹고 아무 때나 잠을 잤고 또 언제나 잠에 들지 못했고, 그게 여전히 반복되는 지금.


유지원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버텼던 시간들 속 소소한 기쁨과 슬픔들이 모두 내 기분처럼 스며든다. 객석의 내가 유지원이 된 것 같고, 또 무대의 유지원이 내가 된 것 같다. 깊은 '공감'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다만 유지원과 내가 다른 것은, 유지원은 '피아노 치자'는 아빠의 손을 잡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것이고 나는 아직 그 자리라는 것이다. 나는 아직 실패하고 무너지고 다쳤던 지난날의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도 "치열하게 사랑한 만큼 실컷 원망해 봤으니 됐다"며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유지원을 보면서 기대와 희망을 얻는다. 언젠가의 나도, 지금의 나를 치열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너그러이 용서해줄 수 있으리라고. 사실 자신은 없지만,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유지원의 용기가 나에게도 찾아와 주기를 바라본다.


<웨딩 플레이어>는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아주 작은 극장이라 배우와 객석의 거리가 가깝다. 비록 코로나 시국이라 극 중 유지원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는 없지만, 어디서든 유지원과 눈을 맞출 수는 있다. 이 거리감은 유지원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공감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사는 꾸며내지 않고 담담하게, 적당한 위트를 섞어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되게 와닿는다. 극작품이 즐겨 찾는 '영웅담' '예술가의 고뇌' '극적인 성장기'처럼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삶에 깃든 드라마틱한 감정을 다루고 있어 앞서 말한 것처럼 피아니스트 유지원의 삶이 객석으로 퍼지면서 관객의 삶으로 확장된다.


모름지기 뮤지컬이라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음악, 재밌다. 결혼행진곡 등 익숙한 클래식을 활용한 넘버들은 귀에 익어 좋고, 극 중 유지원의 감정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넘버의 분위기는 감정이입을 돕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YtBBgpyNU

뮤지컬 <웨딩플레이어> 중 배우 정연(유지원 역)의 '웨딩플레이어' / 본인 촬영

배우는 세 번의 관람 중 두 번을 정연 배우로 봤다. 원래도 잘하는 배우인 걸 알지만 <웨딩 플레이어>에서의 그는 정말 날아다닌다. 무대에서 잠깐 숨을 고를 때도 유지원이지 않은 순간이 없다. 배우와 관객이 어떻게든 소통해야 하는 극 특성상,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 본체가 보이는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정연 배우의 유지원은 빈틈이 없다. 그런데다 혼자 연기에 넘버 소화에 피아노 연주까지 소화하니, 뮤지컬 대상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 아닌지 심각하게 어디다 문의하고 싶다.


밑도 끝도 없이 어렵거나 무겁지 않고, 그렇다고 한없이 가벼운 것도 아니라 누구와도 보기 좋다. 좋은 대본과 음악, 연주가 있고 그걸 소화하는 배우와 연주자가 있으니 데려 올 누군가를 한껏 기대하게 만들어도 좋다. 나는 13년 지기 친구를 데리고 가 본 적이 있고, 친구에게 좋은 작품을 보여줘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공연은 12월 26일까지 한다. 인터파크 티켓에서 예매할 수 있다.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100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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