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글쓰기
# 토크와 관계 맺음
2주 전의 일이다. 야간 출근을 하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작년에 반년 정도 함께 일했던 여자 직원.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생일이 빨랐던 그녀는 따지면 누나였다. 그녀는 오늘 우리 근무지로 하루 지원을 왔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퇴근하는 그녀를 붙잡고 대뜸 내가 말했다.
- 뭐 없나?
그녀가 대답했다.
- 뭐 없냐고? 여자 소개 얘기하는 거제? 뭐가 있겠노. 너도 참 한결같다. 변함이 없네.
웃으면서 받아주고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나를 까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아차 싶었다. 잘 지냈는지, 무슨 일은 없는지, 남자 친구는 잘 만나고 있는지, 근황 토크 없이 다짜고짜 뭐 없느냐라니. 매일 얼굴 보는 사이도 아니고,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녀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할 수 있는 토크 전개였다.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말을 걸어오는 나란 사람이. 하아.
나는 대게 그런 식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라도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의례 물어야 하는 안부 인사나, 마음에도 없는 덕담을 주고받는 토크는 서툴기도 했고, 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깜빡이 없이 차선을 끼어드는 앞차와 같은 느낌. 예고 없이 훅 들어간다. 문제는 친함의 정도에 관계없이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럼 상대방은 때로 당황했고, 때로 오해했다. 최소한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조금 괜찮았다. 그냥 저게 저 사람 스타일이구나. 말은 좀 투박해도 마음은 제법 따뜻한 사람이니까. 이해를 했을 거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에 대해 별 관심도 없을뿐더러, 대부분 나를 잘 알지도 못했다.
물론 사람마다 맞는 스타일이 있다. 나같이 솔직하게 뱉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반대인 사람이 있다. 그래서 나는 대개 호불호가 갈리는 사람이었다. 특히 여자들에게 불호가 많았다. 여자들은 직설적인 나로 인해 쉽게 상처를 받았다. 그들이 남자보다 감각에 예민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토크는 물론 드립도 쓸데없이 솔직했던 나는, 많은 이들을 아프게 했다.
짧은 그녀와의 토크 이후, 일을 하는데 문득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이 연락 한 번이라도 했으면 그녀가 덜 불쾌했을까. 조금은 달랐을까. 뒤늦은 후회와 생각들이 밀려왔다. 나에게는 그게 반가운 인사의 표현이었을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또 그게 아닐 수 있으니까. 아니 그걸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사이였다면 이런 미안한 생각은 안 들었겠지.
이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타인과 관계 맺음, 그리고 유독 그 관계를 유지하는데 서툴렀던 나는 주위에 머물던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나는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그들의 안부와 근황에 무심했다. 과거의 가까웠던 기억만을 가지고 오랜만에 연락을 하면, 그들은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노력이 동반되지 않은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하고 아팠다. 명백히 나의 잘못이고, 나의 책임이었음에도 사람이라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 이런 건가 마음을 다쳤다.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음에도, 내 상처를 돌보기에 바빴다. 스스로가 관계나, 일이나 어떤 것들에 대해 대체로 관대하고 둔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길 바랐던 걸까.
# 아버지, 어찌 그렇게 사셨나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의 토크와 인간관계는 묘하게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아는 사람에게 전화해 대뜸 '자리 하나 구해달라'라는 아버지의 모습이.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만나서 술 사주고, 돈을 쥐여줘도 일자리 소개받기 힘든 상황에, 앞뒤 다 자르고 전화해 다짜고짜 자리 구해달라니. 하아...... 그냥 한숨이 나왔다. 중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그런 방식으로는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를 탔던 아버지는 사람을 상대하는데 매우 서툴렀다. 무뚝뚝한 성격에 특히 사회생활에는 더더욱 소질이 없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굽힌다거나,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별한 기술도 없이 갑자기 배 타는 걸 그만두고 육지에서 아버지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면허가 없던 아버지는 급하게 대형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그리고 학원 운전기사, 관광버스 운전기사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고용은 불안정했다. 사회는 아버지처럼 곧고, 뻣뻣하고,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서 쉬는 날이 많아졌다. 급속도로 어머니와 사이가 나빠졌다. 자연스레 부부 싸움이 잦아졌고, 언제부터인가 각방을 썼다. 부모님은 고달프고 위태로워 보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고. 남자가 능력이 없으면 여자에게 무시당하는 거라고. 남자는 사회생활인데 아버지는 사회생활을 너무 못 한다고. 너희 아버지 장점은 착한 거 하나밖에 없다고. 근데 그게 참 별로라고. 너무 착하기만 해서, 생활력이 강하지 않아서, 엄마가 참 힘들다고. 자식들 보고 버티는 거라고." 그날 어머니는 나를 안고 한참을 우셨다.
대개 이런 식의 기억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야지'. 아버지처럼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남들 다 은퇴하고 놀러 다닐 때, 늦게까지 자식 뒷바라지하는 삶은 살지 말아야지. 착한 것은 장점이 아니라 오히려 단점이라고.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사람 좋다는 허울 보다, 욕을 먹더라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내가 태어났을 때 어른들은 앞다투어 말했다. 아버지와 꼭 닮았네. 마치 복사해서 붙여 놓은 것 같다고. '아들이 아버지 닮는 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형보다 내가 아버지를 훨씬 더 닮은 건 사실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 말이 더 이상 좋지 않았다. 그건 아마 어릴 때 그렇게 커 보였던 아버지의 존재가 점점 초라해 보이기 시작한 즈음이 아니었을까. 20대 때, 부모님 음식 장사를 도왔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되며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평소에도 부모님, 특히 아버지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해 대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장사를 같이 하다 보니 말을 섞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사회생활에 서툰 만큼이나 아버지는 사람을 대하는데 매우 서툴렀다. 무뚝뚝하고 친절하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면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서비스 마인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손님이랑 싸우기 일쑤였다. 애초부터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성격이었다. 가게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아버지와 다투는 시간도 비례했다.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답답해도 네가 참고 이해하라고. 어쩌겠냐고.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만 나는 그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그가 나의 아버지라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꽤 오랜 시간 생각했다. 엮이고 싶지 않다고. 관계를 끊고 싶다고. 호적에서 내 이름을 빼고 싶다고.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사를 정리했다. 부모님은 내가 가게를 맡아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장사하는 10년 동안 우리는 매우 지쳤었다. 더 이상 유지하고 이끌어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 시간보다 더 늙고 아프셨다.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새벽부터 나가는 어머니의 뒷모습, 궂은 날씨에도 배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사실 식당일은 힘든 만큼 사람이 귀했다. 가족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어머니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그렇게 부딪히고 힘들었음에도, 누구 하나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꼼꼼하고, 성실했다. 손님과 싸우는 일이 많아 나와는 항상 어긋났어도, 10년 동안 가게를 유지하는 데 어머니만큼 애를 많이 쓰셨다. 평생을 자식 키우느라 자신의 인생을 돌보지 못했다.
예전에 어머니가 한 번씩 내게 물었다. 혹시 엄마, 아빠가 갈라서게 된다면, 누구와 함께 살고 싶냐고. 나는 그 질문에 매번 아버지라고 답했었다. 어머니는 주위에 사람도 많고, 혼자서도 잘 살 거 같은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아버지는 너무 외로운 사람이라고. 나라도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물론 그 질문은 장사를 하기 전의 질문이었다. 장사가 다행히 잘 되고, 경제적으로 더 이상 궁핍하지 않게 되자 어머니는 그런 질문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쓴다는 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중략) 내 감정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니까.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할 수 있으니까. 아니, 이해해보려고 적어도 노력해볼 수는 있으니까. 그러니 쓴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이제는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내 감정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을까. 응어리를 토해내고 싶었을까. 나조차도 사실 잘 모르겠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던 내 모습이. 매질을 하고 내가 자는 동안 몰래 약을 발라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들이 없던 큰집에 나를 양자로 보내자던, 선거 때마다 빨갱이 찍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이. 미움과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들이.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그리고 어찌 그렇게 사셨는지. 서글펐다. 그가 내게 준 사랑이 너무 크고 일관적이어서. 그의 인생을 내가 몽땅 빼앗은 것만 같아서.
어느새 아버지는 일흔이 넘으셨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화도 적다. 그래도 더 이상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 자식이라도 내가 껴안을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으니까. 아니 자식이라서 어쩌면 평생 껴안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랫동안 아버지와 닮기 싫어했을지라도, 정직하고 성실한 부모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따뜻한 포옹 한 번을 언제 해드렸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더 이상 무뚝뚝한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 하는데 하아.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건가. 그래서는 안 되는데. 가끔씩 리찌가 되어야겠다. 꼬리는 없을지라도. 아버지 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