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글쓰기
#1 응급실 - izi
아직은 어둑한 새벽 출근길, 밤 사이 내리기 시작한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다. 비와 관성에 젖어 비몽사몽 출근을 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에 손이 간다. 무료한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보내기 위해 나름의 루틴을 따른다. 네이버 카페 알림과 메일을 확인하고, 어미새 정보를 훑고, 블로그와 인스타를 거쳐 프랑스존에서 파리 숙소를 찾는다. 망할. 내 마음에 드는 매물은 오늘도 허탕이다. 직장인이나 유학생처럼 장기 투숙은 아니어도, 한 달 이상 머물 마음에 드는 스튜디오를 구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많아 가격이 비싼 게 일단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어째, 파리잖아. 무엇보다 위치가 중요해 파리 1 존, 게다가 중심부와 가깝게 머물려면 어느 정도의 비용은 감수해야지. 급한 건 아니니까 뭐.
한창 여행 다닐 때는 몰랐는데 집을 구하면서 느낀다. 제법 까다롭구나, 나란 사람. 이제 30대라 그런가? 끄응. 떠오르는 생각들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제야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들린다. 마침 요즘 빠진 노래, izi의 ‘응급실’이다. 주크박스 인양 반사적으로 지인에게 카톡을 보낸다. 슈가송 izi '응급실' 영상 링크. 지인의 상황과 가사가 너무 찰떡이라 위로의 말을 더한다. ‘촉촉하네 명곡.’
전송한 영상을 재생한다. 전주가 흘러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관객들의 불이 일제히 켜진다. '후회하고 있어요. 우리 다투던 그 날’ 크으! 첫 소절부터 미친다. 허스키하면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 순식간에 빠져들어 후렴에서는 아예 젖어버린다. '이 바보야 진짜 아니야,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몰라~.’ 진솔한 가사처럼 소리 벗고 팬티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멜로디와 가사에 감정이입이 되어서일까, 창 밖에 비가 와서일까, 센티하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문득 글이 쓰고 싶어 진다. 뭐랄까,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애절함보다는 얼굴 없는 가수의 비애에 시나브로 마음이 스며들었다고 할까. 발매 이후 꾸준히 노래방 애창곡 하면 빠지지 않는 메가 히트곡을 가진 가수. 하지만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가수 소개를 담당하는 MC이자, 선배 가수인 유희열조차. 시간이 너무 흘러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의 얼굴 자체를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설령 안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아니, 기억할 수가 없는 그는 얼굴 없는 가수니까.
몇 번이고 영상을 되돌려본다. 방청석에서 긴장한 슈가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얼마나 떨렸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노래를 부르며 북받치는 슈가맨의 감정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izi의 메인보컬이라고, 노래방의 히어로라고 세상을 향해 한껏 소리친다. 옛날 가수답게 클라이맥스에서 '다 같이 할게요' 멘트도 잊지 않는다. 근데 여기서 나의 감정은 왜 이렇게 요동치는지 하아. izi의 팬도 아니고, 쾌걸춘향 드라마도 보지 않았는데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아무래도 응급실에 정말 스며든 거 같다. 짧은 토크를 통해, 지나온 시간 그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과 상처들이 노래와 함께 오버랩된다. 그의 인생 굴곡을 전부 알 수는 없어도, 인생의 '희'와 '애'가 내게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노래가 소환하는 잊고 있던 그 시절 속으로.
#2 스며들다
이별하면 모든 이별 노래의 주인공은 내가 되고, 썸을 타면 소유, 정기고 노래 ‘썸’이 그렇게 달달할 수가 없다. 여행지에서 들었던 노래들은 일상에서도 여행의 기억을 소환시켜준다. 말 그대로 매직이다. 이니에스타 매직은 아니고, 시크릿 magic정도? 음... 미안하다, 사과한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Oh my magic magic magic my magic magic magic~! 그냥 미친 거 같다. 주크박스에 빠졌나 보다. 노래가 마약이라 주체가 안 된다. 가끔씩 내가 돌아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근데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자세히 보면 사람들은 어딘가 한 군데씩 이상하거나, 어딘가에 미쳐있다. 주변에 한 두 명은 꼭 있지 않나? 돌아이 같은 친구들. 근데 그 친구는 꼭 나를 이렇게 부르더라. “야이 돌아이야.”
『여행의 이유』김영하 작가도 말한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내가 돌아이가 아니라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 혀가 길어진 건 아니다. 사연 없는 사람, 사연 없는 인생 없듯이, 사연 없는 노래 역시 없다. 그래서 사람마다 스며드는 노래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역시 난 돌아이인 걸까.
어쨌든 우리에게는 노래를 듣는 순간, 문득 그 시절이 떠오르는 곡들이 있다. 마치 마법처럼 말이다. FT 아일랜드 '사랑앓이'와 렉시 '하늘 위로'. 이 두 곡은 내게 2007년 6월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도망치듯 스무 살에 입대를 하고 훈련소를 거쳐 자대 배치받은 그때 그 시절. 한없이 미숙하고 초라했던, 계급사회에 적응하기 애먹었던, 이해 안 되는 것들 투성이었던 그때의 나를 마주한다. 주말 가요 프로그램의 노래를 주워듣는 것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시간들. ‘사랑앓이’는 8월 전역을 앞둔 병장의 애창곡이었고, ‘하늘 위로’는 멜로디가 너무 신나 중독성이 강했다.
아 갑자기 내 귀에 대고 채환의 '파이팅' 노래를 부르던 다른 병장 새끼가 떠오른다. '파이팅~ 파이팅~ 아름다운 나의 인생~!’. 내 귀에 캔디도 아니고, 지가 옥택연이야 뭐야 씨발. 자기는 말출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나에게 며칠 남았냐 묻던 그 면상. 분명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그 멜로디가, 가사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인상적인 씹새끼였나 보다. 또 흡연장으로 나를 데려가 담배 피우냐며 토크를 시작하던 갓 상병을 단 나의 사수도 떠오른다. 그와의 에피소드는 정말 많지만 결론은 하나다. 그 새끼 그거 진짜 한 대 쳤어야 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시나브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신기한 건 잊고 있던 그날의 공간, 흡연실의 분위기, 심지어 고유한 냄새까지 여전히 내 몸에 생생하다는 거다. 다들 저마다의 시름을 한가득 짊어진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 같다. 그들이 전부 나의 선임이기에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무엇보다 그들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더 끔찍해진다. 지나고 보면 추억인 줄 알았고 또 그렇게 지내왔었는데, 이렇게 기록을 하며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마주하니 분명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몸이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의 패턴인 걸까? 왜 안 좋은 기억은 유독 오래가는 걸까, 씨발.
글을 쓴다는 것은 간접적인 행위이지만 오감을 동원하면 그것은 마치 놀라운 가상현실처럼 우리에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그런 글쓰기가 습관이 되면 일상생활에서도 더 민감하게 오감을 동원하게 됩니다. - 김영하, <말하다>
영감이 별거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그게 바로 영감이 되는 거지. 스쳐 지나가버리는 생각이 아니라 그런 순간들을 문득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너무 쉽게 잊히니까.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수많은 슈가맨들처럼 나도 세상의 기억에서 사라질까 봐, 나조차 나를 잊어버릴까 봐. 결국엔, 나를 잃어버릴까 봐. 근데 연예인도 아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관종인가? 아니다. 아닐 거다. 관종이라도 뭐 어때. 모든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사고하니까.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때가 있고, 지나간 시간의 스스로를 마주해보고 싶은 때가 있으니까.
글쓰기는 우리가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과거를 생생하게 우리 앞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 김영하, <말하다>
글은 쓴다는 일은 참 신기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시작은 어려워도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을 적어 나가다 보면 또 그럭저럭 이어나갈 수 있다. 막연히 글 쓰며 살고 싶다 생각만 했지, 진득하게 써보고 희망을 가져본 적이 언제였던가. 글을 쓰며 무의미한 생활에 활력이 되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현재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고민해보고 싶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