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대단한 영감이나 어떤 계기가 있어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닙니다. 직업으로서의 작가를 어렴풋이 상상해보거나 글로 먹고사는 걸 소망한 적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마음이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신기루를 좇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출간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전문성과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는 분야, 직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작가, 전업작가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글을 한 번 써보는 거랑 글로 먹고산다는 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이걸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음에도 작가가 되겠다고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쓴다는 건, 꾸준히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품과 끈기, 성실, 집요함을 요구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작가조차 흔들리는 날이 많습니다. 가뜩이나 그런 불안한 마음인데 주위의 의심스럽고 불안한 시선마저 견뎌내야 합니다. “네가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은 뭐 아무나 쓰니, 작가는 아무나 되는 줄 아나, 일은 하기 싫고 뭐라도 붙잡고 있기 위해 그런 거 아니냐, 정신 좀 차려라……” 특히 나를 아끼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런 걱정과 불안감을 격렬히 내비칩니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끊임없이 다그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망설였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과 업으로 하는 일은 분명 다르니까요. 지금도 자신은 없습니다. 작가로 살아가는 혹은 살아남는 일은 불확실하고 아주 비효율적입니다. 정말로 글 써서 밥벌이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며, 최소한의 생계유지는 가능한 상태에서 글을 써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짧은 시간, 일하며 그런 가능성을 더듬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직장을 다니면서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되긴 합니다. 꾸준히 글을 쓴다는 건 몸과 마음의 건강이 받쳐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일을 그만두고 돈이 되든 안 되든 글 적으며 살겠다고 결심한 계기도 몸과 관련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몸이 삭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교대근무의 고충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몸 상태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또 다른 자아를 갉아먹었습니다. 때마침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의미 없는 일을 하며 길지 않은 인생을 더는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멀어지기 전에, 내 몸과 정신이 더 상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심연에서 아물거리는 그 무엇을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명하지 못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선택인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살아보니 인생이란 그렇더군요. 결코, 현명하게만 살 수 없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살 수밖에 없더군요. 생각하는 성과나 만족을 얻지 못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일도 있을 겁니다. 아니, 돌아가야만 되겠죠.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철없는 20대가 아니잖아요. 최소한 내 몫은 책임져야만 하는 어른이 어느 순간 되었잖아요. 그 사이 고통스러운 현실과 방황 역시 제가 감내할 부분이겠죠.
그래도 말입니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어제보다 오늘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 게 우리 인생이라면,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수밖에 없다면, 이왕이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후회하고 싶습니다. 결과를 떠나 최선을 다하고 싶고 무엇보다 놓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이러한 선택으로 잃는 것들 역시 있습니다. 열악하지만 안정적인 직장,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결혼은 더 멀어지는 결정입니다. 제가 포기하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겠죠. 지금 제게는 그런 것들보다 좋은 글을 꾸준히 쓰고 싶다는 열망, 제 안에 작게나마 맺혀 꿈틀거리는 그 마음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직장을 다니며 책상 앞에 앉는 힘을 길렀습니다. 꾸준히 기록하며 글 쓰는 근육을 키웠습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엉덩이 힘과 고집을 잃지 않았습니다. 꾸역꾸역이라도 앉아 있다 보면 뭐라도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고독하고 배고픈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적은 돈을 모았습니다. 일하며 버티고 버틴 그 시간 덕분에 비로소 글을 써야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음먹었으니 가봐야죠. 무엇이 있을지 몰라도 마음이 이끄는 그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