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에 부쳐
학부 시절, 정치경제학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여러 문헌과 자료들을 보며, ‘자본주의는 어떠한 원리로 작동하고 성장하는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긴장관계인가’, ‘노동운동은 자본주의경제를 가로막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연구하는 과정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이 학문을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고, 향후에도 직업으로 삼으면, 모두의 꿈인 ‘덕업일치’를 이룰 수 있겠다는 기대도 ‘막연하게’ 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를 ‘구체적으로’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현실의 경제형편 때문이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대학원 진학 시, 이공계 학문에 비해 지원이 적어, 학비충당이 쉽지 않아 보였다. 대학교까지 마쳤는데,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부담스러웠고, 그렇다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공부를 지속해나가는 것도 어려워보였다.
어찌어찌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보자. 시작부터 이미 수 천 만원의 빚을 떠안고 있을 것이고, 이것을 만회하려면 유명한 연구소의 연구원 혹은 대학교수가 되어야 할텐데, 어디 쉬운 일인가.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최저임금’수준의 월급을 받는 시간강사가 되어 빚도 갚고, 앞으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이 계획이 틀어진다고 해서 중간에 방향을 돌려 일반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은 경영학, 회계학 등 기업전반에 필요한 학문도 아니고, 전자공학, 기계공학 등 산업에 필요한 학문도 아니지 않은가.
답은 명확했다. 결국, 정치경제학의 길을 접고 일반기업으로의 취직을 선택했다. 그것조차도 쉽지 않아 70여개의 원서를 넣어서 한 중견기업에 합격, 8년째 그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부모님께 손을 안 벌리고 취직에 성공’한 – 민망하지만 - ‘자랑스러운 자식’인가. 그렇지는 않다.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집안사정 덕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필요하면 과외 1-2개 쯤은 들을 수 있었고, 학부시절에도 생활비 충당에 대한 어려움 없이 학점관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성적우수 장학금을 3~4차례 받았는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공부했다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수 천만원의 학자금 관련 빚을 지고 사회에 진출했던 몇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나도 어느 정도의 ‘부모찬스’의 혜택은 누려왔던 셈이다.
(이미 사과를 한 마당에 다시 이야기를 꺼내 미안하지만) 정유라씨는 2014년, 자신의 SNS를 통해 ‘돈도 실력’이라는 글을 올렸었다. 이것이 언론이 보도되며 논란이 일었을 때,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돈은 당신의 노력으로 번 것인가요?’.
정유라씨가 했던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노력의 기원은, 정유라씨 본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란 의미다. 그 글에서 정유라씨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니네 부모를 원망해’. 그렇다. 그 ‘실력’이라는 돈이, 결국은 ‘부모찬스’였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인국공 사태’로 시끄러운 지금,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의 대학 타이틀, 당신의 어학점수, 당신의 스펙. 이것은 오직 당신의 ‘노오력’ 덕분인가. 강남출신 학생이 강북출신 학생보다 서울대 합격률이 21배나 높다는 연구자료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지런하고 성실한 학생들이 ‘우연히’ 강남에만 몰려 있었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 오롯이 그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성공도, 개인의 부족함만으로 되는 실패도 없다. 충분히 ‘노오력’할 수 있는 그 환경조차도, 외부로부터의 혜택이 일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환경조차도 누릴 수 없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다. 구의역 김군에게도, 비정규직 김용균씨도, ‘노오력’해서 정규직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들이 ‘노오력’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정 아닌가? '기회의 불평등' 아닌가?
시험만이 공정한가? 그것이 ‘기회의 평등’인가? 그렇다면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던 그 여건 자체는 평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출발조건의 ‘불공정’함은 왜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 둘 다 감수(이것이야말로 불공정이다)하며 일해왔던 사람들의 ‘노동’을 평가기준으로 채택할 수는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일 해왔는데 ‘무임승차’라니, 왜 ‘그간의 노동’은 취급조차 하지 않고, 꼭 시험이어야 하는 것인가? 시험만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별할 수 있는 유일의 기준이 되는가? ‘성적순’, ‘출신대학’을 평가기준의 우선순위에 두었던 기성세대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다시 외쳐야 한단 말인가.
누구는 이를 보고 ‘로또 취업’이라며 분개한다. 진짜 로또는 다른 곳에 있다. 경제력 좋은 부모를 만난 것이야말로 ‘로또’ 아닌가? 재벌총수 아버지를 만난 것이야말로 ‘로또’ 아닌가? 전술했지만, 강남출신 학생의 서울대 합격비율이 강북에 비해 월등히 높다. (서울대 입학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노력의 기원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생물학적 이유’로 거대기업을 물려받는 것이야말로 ‘로또’ 아닌가? 물론 그들도 외국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겠지만, 그 ‘노오력’이, 그들이 기업을 물려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란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노력’보다 ‘누군가의 아들’이란 것이 더 크게 작용하는 사회구조, 왜 이에 대해서는 이만큼이나 분노하지 않는가?
여러 언론들에서 인국공 사태를 보고 ‘공정에 민감한 세대의 분노’라 평한다. 동의할 수 없다. ‘시험을 봐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노동에 대한 혐오’를, 구의역 김군과 비정규직 김용균씨의 죽음에는 침묵하고, 재벌들의 행태보다 ‘비정규직의 무임승차’에 대해 더욱 분노한다는 것에서 ‘약자에 대한 혐오’를, 그리고 이렇게나 불공정한 고용시장구조에 대한 분노와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것에서 ‘사회구조 인식에 대한 부족’이 더 짙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