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HEE Jul 05. 2016

생각 조각집

생각 조각 모으기 


생각이 끝까지 마무리 되지 않을 때의 찝찝함. 그것은 한 여름날 흘린 땀 보다 더 불쾌하다. 온전히 마무리 되지 못하고 떠도는 조각들이 괜히 머리 속만 복잡하게 헝클어 놓는다. 





#1_ 여행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에 대하여 


이번 학기는 유난히 길었고, 어느 학기 보다 힘들었다. 4학년에 만난 과목들은 사망년(3학년)의 것 보다 더 어려웠으며-나와 맞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전공 공부 이외에 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종강하자 마자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가자"

"그래"


그리고 정확히 1주일 뒤, 우리는 티켓을 끊었다. 친구가 물었다. "어쩐 일로 네가 여행을 다 가자고 하네?" 

내가 여행을 가고 싶은 것은 내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었기 때문일 거다. 대한민국 이 곳에서 내게 벌어지는 모든 것들, 내게 닥쳐진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국말 조차 들리지 않는 한국을 벗어나 있으면 왠지 내 시간이 멈춰 질 것 같았다.


사실 여행을 간다고 한 들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국에 돌아오는 순간 모든 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힘들어 하던 그 어떠한 것들도 마법처럼 해결돼 있진 않을 거다. 마치 이런거다. 한참을 내 방에서 과제와 공부, 프로젝트에 치여 있다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다. 방은 어지럽혀 져 있지만 아무 것도 끝내지 못한 채 참다 참다 결국 화장실에 다녀 왔다. 내 방엔 내가 어질러 놓은 것들이 가만히, 그대로 놓여있고 내가 해야 할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손을 놓은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있다. 그래도 내 몸은 시원하다. 이렇게 화장실 다녀오듯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난 현실을 잠시 도피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다. 아, 여행. 얼마나 허울 좋고 낭만적인 핑계이던가.






#2_ 우리는 더이상 돈키호테가 될 수 없다.


오랜만에 모인 동창 모임. 아이러니하게도 나 빼고 모두 '돌아온 싱글'이 됐다. 물론 아무도 기혼이었던 적은 없다. 몇은 직장인이 됐고, 몇은아직 학생으로 남아있다. 여자 넷이 모이니 '연애'는 빼 놓을 수 없는 수다거리였다.


제법 긴 연애를 끝낸 A양은 요즘 소개팅을 보는 것에 한창이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어진 사람은 없다.

별 희한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도대체 왜 찬거야? 괜찮은데?' 싶은 사람도 있었다. A양이 말했다.

"이젠 소개팅 한다고 꾸미는 것도 일 이야. 남잔 다 거기서 거기 같애. 별로 다를 것도 없더라."


그러면서 내게 

"넌 지금 남자친구 잘 잡아. 네 오빠 정도면 훌륭하잖아." 

하고 말했다. 


훌륭하다는 표현은 꽤 고마웠지만, 어떤 기준에서 훌륭하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외모는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그 친구 기준의 '훌륭함'은 성격, 직업, 재력 같은 조건이었다. '남자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가 시작되지 마자 수도 없는 조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2세를 위한 유전적 조건까지. '아직 스물 다섯'이라고 믿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 한 남자와 오랜 연애를 해 와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것일까. 


"좋아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한거 아니야?"하고 내뱉는 내 말에 

'쟨 아직도 열 다섯이라니?'하는 표정들로 날 쳐다봤다. 


 이제는 제법 머리도 커서 호감만으로 연애하기도 힘든 나이가 됐다고 한다. 더이상 우린 어리지 않으니. 앞뒤 가리지 않고, 어떤 것도 재지 않고 감정에만 충실하기엔 이미 충분한 어른이 됐단다. 각자의 사회생활과 각자의 가족, 각자의 사람 관계와 각자의 생활, 모든 것이 뚜렷하게 자리잡은 지금 사랑이 불타오르기란 쉽지 않단다. 벽돌 쌓듯 차곡차곡 쌓인 장작보다 엉성한 나뭇가지 틈새로 불씨가 더 잘 붙 듯이. 그래서 남자를 보는 조건들이 하나 둘 씩 생기게 된단다. 내 삶의 체계를 흐트러 놓지 않을 조건. 


심지어 시작도 하기 전에 소모될 감정에너지가 미리 계산이 된다고 한다. 그게 겁이 나는 거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수 십번 싸울 것이고,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혹은 별로 가고 싶지 않는 것도 해야 할 때가 있다. 모처럼 여유롭게 쉬고 싶은 주말을 상대를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연인 관계가 안정되기 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 모르는데 쉽게 도박을 하기엔 돈키호테가 철이 들어 버린 거다.


그냥 혼자 사는 게 낫겠다, 친구야. 






매거진의 이전글 준비되지 않은 이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